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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징용 유골이 안치된 연경사(좌)와 고 신정성수씨의 유골.
ⓒ 정일응
일본에 강제 징용됐다가 희생된 조선인 가운데 상당수가 유골조차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16일 일본 TBS방송 보도국 나카지마카제 기자팀이 당시 토치기현 아시오(현재 이름 니꼬시) 광산에서 사망한 한 유골의 유가족을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후손이 나타나지 않고 있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나카지마카제 기자팀은 지난 13일 한국을 방문해 경남 양산시 상북정 493번지에 살다 일본에 강제 징용으로 끌려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박성수(1902년 5월 18일 출생)씨에 대한 유골의 정보를 갖고 양산시와 합동으로 유가족을 찾고 있다.

나카지마카제 기자는 박성수씨가 토치기현 아시오 광산의 전기발전소 건설공사장에서 일하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1942년 5월 30일 사망해 현재 니꼬시 위치한 연경사에 유골이 안치돼 있다고 밝혔다.

연경사에 안치된 유골은 총 73명으로 그중 박성수씨에 대한 정보만 남아 있을 뿐 나머지는 무연고 유골로 지금까지 한 스님이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지난 1997년 토치기현의 한 시민단체인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이 양산시에 박성수씨에 대한 호적을 찾아달라고 서면으로 통보해왔으나 당시 양산시는 소극적으로 대처, 호적등본만 찾아내 대가 끊겼을 것이라고 통보했다.

이 같은 내용이 일본의 한 지방신문에 보도되고 이를 나카지마카제 기자팀이 타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명지대학교 홍종필 교수의 자문을 받아 양산을 방문, 상북정 493번지를 찾았으나 이미 건재상 창고로 변해있었다.

양산시의 한 관계자는 “1997년 당시는 건재상이 없었으며 그때 적극적인 조사를 했더라면 그 마을에 연고자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호적에는 박성수씨의 아버지 박민조씨의 사망 이후 자손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 대가 끊겼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한편 호적등본에는 박성수씨가 아닌 신정성수로 개명돼 있는 것으로 봐서 1940년 창시개명 후에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정성수씨가 39세 정도에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인데, 당시 13~20세까지가 강제징용 대상이므로 창씨개명 이후 강제징용이 아닌 돈을 벌러갔을 경우도 조심스럽게 점쳐지고 있다.

한편 일본 TBS방송 보도국 나카지마카제 기자팀은 호적등본에서 박장수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혹시 어릴 때 부르던 이름인지 수소문하기로 하고 종친회, 노인회, 외가의 인척까지 백방으로 추적하고 있으며 오는 18일 출국할 예정이다.

일본 각지에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강제동원 희생자가 수만 명에 달하지만 아직 사망 여부조차 확인되지 않은 유골이 일본에 다수 남아있어 한국과 일본 사회의 관심이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 경남뉴스연합(ysnplus.com)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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