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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여수의 흥국사 원통전. 특이하게 丁자 모양을 하고 있다.
전남 여수의 흥국사 원통전. 특이하게 丁자 모양을 하고 있다. ⓒ 김성후
관세음보살은 대세지보살과 함께 아미타불을 좌우에서 모시는 협시보살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살에 대한 중생들의 관심이 높아지자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의 협시보살이 아니라 자비의 화신이자 중생들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보살로 독립된 세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건물이자 그의 세계를 상징하는 건물로써 절 안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때는 원통전(圓通殿)이라 하고 절 건물의 일부에 속하는 경우에는 관음전(觀音殿)이라고 보통 부릅니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며 줄여서 관음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관세음보살을 설명하기를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이 한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곧바로 그 음성을 듣고 그를 해탈케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일 어떤 이가 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받들면, 큰 불 속에 들어가더라도 불이 그를 태우지 못하고, 큰물에 떠내려가더라도 곧 얕은 곳에 이르게 되며, 온갖 야차나 나찰들이 괴롭히려 하더라도 해칠 수 없다는 등의 인연으로 관세음이라 이름 붙였다고 합니다.

명부전과 지장전

미륵보살이 부처가 되어 이 땅에 태어나려면 56억 년이 지나야 합니다. 그 동안 하늘나라부터 지옥까지 끊임없이 윤회를 거듭하는 많은 중생들을 누가 교화하고 구제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윤회를 거듭하는 중생들은 자신의 사후 세계를 심판하고 관장하는 누군가의 등장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으며 그 염원을 등에 업고 등장한 보살이 바로 지장보살입니다.

전남 화순 쌍봉사 지장전 내. 지장보살,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상
전남 화순 쌍봉사 지장전 내. 지장보살,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상 ⓒ 김성후
중생들은 자신의 염원을 바탕으로 지장보살을 절 안에 모셨으며 또 지장보살의 세계를 상징하는 건물이 생겼으니 그 건물의 이름을 명부전(冥府殿) 또는 지장전(地藏殿)이라 하였습니다. 이 건물에는 지장보살을 홀로 모시고 있거나, 중앙에 지장보살을 모시고 양쪽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있으며, 그 좌우로 죽은 뒤 지옥에서 죄의 경중을 다루는 10명의 재판관인 시왕(十王)을 모시기도 합니다. 이럴 경우 시왕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지장보살의 전생은 바라문의 아름다운 딸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어머니가 방탕한 생활을 하다 죽고 난 뒤 그 죄의 대가로 고통 받는 것을 알고는 무척 슬퍼하였습니다. 그녀는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베풀어 어머니가 그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다보니 마지막으로 입은 옷까지 벗어주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낌없이 베풀다 보니 그녀는 각화정자재왕여래(覺華定自在王如來)로부터 지장보살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처의 인도로 지옥세계를 구경하고는 그 고통스러워하는 중생들의 모습을 보고 “죄과로 인해 고통 받는 육도 중생들을 모두 해탈케 한 연후에 성불하겠노라”는 원을 세웁니다. 마침내 지옥 중생을 구제하리라는 지장보살의 대원(大願)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장보살은 지옥을 포함하여 고통 받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죽음의 세계까지 관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응진전과 나한전

초창기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은 아라한(阿羅漢)을 목표로 수행을 했으며 또한 석가모니는 자신의 제자들을 아라한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라한이란 치열한 수행 끝에 모든 속박과 번뇌를 끊어버린 자로서 마땅히 공양을 받을만한 사람이란 뜻으로 줄여서 나한(羅漢)이라고 부릅니다. 아라한은 더 이상의 윤회도 없으며, 더 이상 닦고 배울 것이 없으며, 진리와 일치하기 때문에 응진(應眞)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의 제자들을 모신 건물을 나한전(羅漢殿) 또는 응진전(應眞殿)이라 하였습니다.

보물 제703호 경북 울진 불영사 응진전. 16나한을 모시고 있다.
보물 제703호 경북 울진 불영사 응진전. 16나한을 모시고 있다. ⓒ 김성후
이 건물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가운데 모시고 양쪽으로 제자들을 대표하는 아난존자와 가섭존자를 모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건물 안에 모시는 나한의 숫자는 각기 다른데 주로 16나한을 모시며 어떤 곳은 5백 나한을 모시기도 합니다.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나 6나한도를 걸어 두기도 합니다.

아라한을 자기만의 깨달음을 추구하기 때문에 대승불교는 대신 보살을 내세웠다고 하는데 왜 아라한을 모시는 건물이 만들어졌을까 궁금해지기도 할 겁니다. 그 이유를 추론해보면 아마도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 즉 승려는 불·법·승(佛·法·僧)이라는 거룩한 삼보(三寶) 중의 하나로 존경과 신앙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아라한은 부처와 함께 번뇌를 남김없이 끊은 성인(聖人)이기 때문에 존경의 대상이 되어도 아무런 이상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법화경> “오백제자 수기품”에서처럼 5백 명의 나한들이 모두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는 것을 볼 때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선(禪) 불교의 영향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불교의 조사(祖師)는 깨달은 사람입니다. 이들이 승려로서 깨달았음을 나타내는데 같은 승려로 번뇌를 끊어버린 나한은 서로 어울릴만한 자격이 있고 신앙의 대상이 될 자격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 추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사전과 국사전

절에 모셔진 분 중에서 가장 귀한 분은 당연히 부처이며 그 다음으로 보살과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이었습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는 절을 처음 세웠거나 오래 전 이 절에서 큰 가르침을 펼치면서 이름을 드높였던 조사(祖師)스님 또는 나라에서 스승으로 모신 국사(國師)스님들의 영정이나 위패를 건물 안에 모시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인도-중국-한국’으로 불교가 전래되면서 다양한 불교의 사상이 서로 섞이고, 또 불교가 아닌 다른 사상과 혼합도 생기는 등의 과정 속에 탄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조사를 모신 건물을 조사당(祖師堂), 국사를 모신 건물을 국사전(國師殿)이라고 부릅니다. 조사(祖師)라고 하면 한 종파(宗派)를 새로이 창시하였거나 그 종파의 법맥을 이은 승려를 일컫는 말인데 조사전은 바로 이런 분의 영정이나 위패, 조각상 등을 모신 건물이란 뜻입니다. 조사전이 없는 절에서는 영각(影閣)을 짓기도 하였으며, 나라의 스승인 국사(國師)를 배출한 절에서는 국사전에다 영정, 위패 등을 모시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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