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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엽기 급훈'이라는 것이 유행처럼 번질 때가 있었다.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식의 뻔한 표현을 떠나 시대에 맞는 자율적 급훈을 내걸자는 취지에서는 의미가 있는 시도였다.

재미있기보단 씁쓸하던 급훈들

하지만 소위 인터넷에 '떴다'하는 내용을 들여다보면 밝은 웃음보단 씁쓸한 미소를 짓게 하는 것들이 많았다. '2호선을 타자'나 '10시간 서울대, 8시간 연대, 7시간 이대' 정도는 그나마 애교 정도로 봐줄만 했다.

'10분 더 공부하면 마누라가 바뀐다', '삼십분 더 공부하면 내 남편 직업이 바뀐다'라는 표현을 보곤 '과연 저런 급훈을 교실에 걸게 허락해 준 담임교사는 누구일까'라는 의문이 일었다. 하지만 정말 아픈 건 '대학가서 미팅할래? 공장가서 미싱할래?'라는 문구였다.

▲ 옛 공장과 현대식 건물이 공존하는 구로공단 지역.
ⓒ 나영준
그 급훈을 접했을 때 문득 80년대의 학창시절이 생각났다. 자라고 학교를 다닌 곳은 서울 구로동, 전 국민이 아는 지명 '구로공단'의 영향권이었다. 그리고 몇몇 선생님들은 이야기했다.

"대학 못 가는 놈들을 뭐라 그러는지 알아? 잉여인간이야, 잉여인간! 그럴 놈들은 아예 학교 때려 치고 저~기 구로공단 가서 나사나 돌려. 가깝고 좋잖아. 왜, 좋은 공장 하나 추천해주랴?"

아이들은, 웃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웃었다. 이상한 아이로 비쳐지기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팠다. 같은 시간 인쇄공장에서 '삔따(기계에 인쇄할 물건을 넣는 일)'를 끼우고 있을 죽마고우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왔다. 어른이 되면 적어도 다른 이들을 함부로 웃음거리로 만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며칠 전 TV 광고를 보다 다시 그때처럼 가슴이 아파왔다.

광고에 버젓이 '열심히 공부하면 신랑 얼굴이 바뀐다'라니

지난 8일부터 전파를 탄 한 이동통신사의 '청소년용' 요금제 TV CF 였다. 결혼식이 열리고 있다. 그런데 축하하러 온 친구들이 울고 있다. 주례 선생님까지 안타까운 표정을 금치 못한다. 게다가 신부 아버지는 '차마' 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린다. 배경음악은 김수희의 '너무합니다'가 흐른다.

▲ 결혼식에서 신부의 아버지가 괴로워 하고 있다.
ⓒ 화면캡쳐
▲ 친구들도 울고 있고.
ⓒ 화면캡쳐
▲ 신부도 울고 있다.
ⓒ 화면캡쳐
▲ 신랑은 '마빡이' 정종철. 신부가 기절하고 있다.
ⓒ 화면캡쳐
잠시 후 신랑의 얼굴이 드러난다. 신랑은 바로 '마빡이' 정종철이다. 신부와 달리 싱글벙글한 얼굴이다. 결국 신부(박신혜)는 기절을 하고 만다. 알고 보니 꿈이었다.

교실에서 자다가 놀라서 깬 여학생은 주변을 살핀다. 방금 꾼 꿈에서처럼 실제 마빡이가 다가온다. 여학생은 고개를 돌려 교실 벽에 붙어 있는 급훈을 바라본다. 이윽고 클로즈업 되어 다가오는 급훈.

바로 '열심히 공부하면 신랑 얼굴이 바뀐다'이다. 이어 '열공(열심히 공부)'이라 쓰인 머리띠를 두른 여학생이 공부를 하는 모습이 나오고, 창 밖에서는 정종철이 "제발 공부 좀 그만 해"라고 울부짖는다.

▲ 꿈에서 깬 여학생이 급훈을 바라본다.
ⓒ 화면캡쳐
▲ 클로즈 업 되는 급훈.
ⓒ 화면캡쳐
▲ 열심히 공부하는 여학생 뒤로 '마빡이'가 괴로워 하고 있다.
ⓒ 화면캡쳐
가볍게 웃자는 의도를 몰라 "구구절절" 이야기를 풀어 놓은 것이 아니다. 실제 이 시대의 학생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현실적이고 영악할 수 있다. 어쩌면 '대학물' 정도는 먹어야 이 사회의 한 구석에 끼어들 수 있다는 것 정도는 굳이 어른들이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깨우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적시'를 해가며 대학에 가는 목적(?)을 강조해야 했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남는다. 물론 개그맨 정종철씨가 매우 잘 생긴 얼굴이라고 떼를 쓰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자신의 개성적인 외모를 이용해 돈을 버는 연예인일 뿐이다.

어쩌면 이 황금만능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간판과 능력으로 사랑마저 살 수 있다'는 게 때로는 진실일 수도 있다. 사실 그런 것으로 살 수 있는 건 '사랑'이 아닌, '사람'이라고 믿고 있지만….

아쉬운 건 전 국민이 보는 광고에서 '좋은 대학을 나와야 예쁘게 생긴 배우자를 얻을 수 있다'고 까지 가르쳐야 했는가 하는 부분이다. 그들은 과연 광고를 볼, 다른 이보다 외모가 뒤처지는 이들에 대해서 단 한 번이라도 고민을 해 보았을까.

정말 그런 것일까. 대학에 가는 진정한 이유는 그런 것뿐일까. 그래서 외모가 떨어지는 이들은 그렇게 쉽게 다른 이들의 조롱거리가 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광고를 만드는 이들은 그런 배려는 해 보지 않았을까? 아니 그보다는 방영 전 시사회를 봤을 광고주는 단 한 번의 염려도 없었을까?

다시 한 번 고교시절 한 선생님이 생각난다. "야, 이놈들아. 대학 안 나오면 취직도 못 하고 결혼도 못해"라고 말씀하곤 하셨다. 하지만 지금, 대학을 가지 못한 대다수 아이들은 결혼을 했고, 각자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정말이지 궁금해진다. 과연 'KTF적인 생각'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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