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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고 싶어졌다. 떨칠 수 없는 외로움을 삼키기 위해, 잊히지 않는 사랑을 식히기 위해 단 하루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베니를 만나면서. 그녀처럼 달리면 내 마음 속의 응어리도 조금씩 용해되어 사라질 것만 같았다.

공지영의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을 읽은 건 지난 여름, 나를 첫사랑이라 말하며 눈물짓던 한 남자를 버리고 떠난 길 위에서였다. 그날 나는 강릉 시내의 한 정류장 앞에서 오지마을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두 시간 째 오지 않는 버스와 아침부터 줄곧 내리는 비에 심신이 지쳐가고 있었다. 그때 길 건너편에 있는 허름한 책방이 눈에 띄었고 그 곳에서 베니와 윤오를 처음 만났다.

베니가 윤오를 만난 건 '기적도 있고, 우연을 가장한 필연은 정말 있으며, 진심으로 간절히 원하면 풍요로운 우주의 선이 나를 도와줄 것'이라 믿던 22살 때였다. 베니는 이노카시라 공원에서 처음 만난 윤오에게 변하지 않는 사랑을 믿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고독하게 살아온 한 영혼이 마침내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 내뱉은 외침 같은 것이었다.

내 것과 닮은 그들의 사랑

나는 우연히 손에 넣은 <사랑 후에 오는 것들>를 한 장 한 장 아끼며 읽었지만 반나절이 지난 그날 저녁에 마지막 장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베니와 윤오의 사랑이 오래 전 나의 사랑과도 너무나 닮아 고독한 여행길에서 동병상련처럼 위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나는 마지막일지도 모를, 다시 시작된 사랑으로부터 도망쳐온 길이기도 했다.

당시 내 나이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느냐' 하는 물음 따위는 이뤄지지 않은 첫사랑의 기억과 함께 묻어버린, 베니와 같은 스물아홉 살이었다. 법정 스님은 '글이나 사상은 그 저자의 정신 연령에 이르러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다르지 않지만 저마다에겐 특별한 것이 사랑인데 그들의 사랑이 유난히 와닿았던 것은 그렇게 등장인물과 많은 것이 내 자신과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첫사랑은 베니보다 2년 늦은 24살 때 찾아왔다. 이노카시라 공원에서 베니가 윤오를 알아보았듯 나 역시 '그'를 알아보았던 것 같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약속 장소에 미리 나와 서 있는 그의 모습이 그림 속 사진처럼 선명했다. 그리고 그와 나를 둘러싼 시간만이 순간, 아주 천천히 흐르는 듯도 했다.

다시 그릴 수 없는 그림을 그리듯 (물론 그 시절엔 결코 알지 못했지만) '우리'는 사랑을 했었다. 사랑이 처음은 아니었다. 마치 준고처럼 당시 한 번의 이별을 겪은 나는 슬픈 눈을 한 채 운명인 듯 다가오는 그 사랑을 부정하려 했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인형을 든 베니처럼 내게 나타나 모든 걸 다시 시작하게 해 주었다. 절대로 다시 시작할 수 없으리라 믿었던 모든 것이 사실은 그때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앞서 한 사랑은 그 사람이 아니라 사랑이란 감정을 사랑한 것이었고 그 다음에 만난 사랑이 내게는 정말이지 첫사랑임을 자각한 것이다. 나는 그때 그 사랑이 5년이 지나도록 잊히지 않을, 마음마저 얼어붙게 할 상처가 되리란 것을 꿈에도 몰랐다.

아름다운 것들은 빨리 시들어버리듯 내 첫사랑 또한 그랬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기에 더없이 벅차고 사랑스러웠지만 그것은 그만큼 서툴렀기에 위태로웠다. 베니가 사랑한다면서 항상 함께 있어주지 않는 윤오를 이해하지 못했듯, 윤오가 매일 밤 온몸이 젖도록 홀로 달리는 베니를 이해하지 못했듯, 그리고 급기야 그 몰이해와 서운함이 미움으로 변해버린 것처럼 오래 전 나의 사랑도 그러했다.

그렇게 얼마지 않아 나는 이별을 했고 한번 끝난 사랑은 결코 본래의 색깔을 회복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때 가장 아름답게 빛나던 기억들이 잿빛의 악몽이 되어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다.

눈물이 땀에 가려질 때까지 달리는 거다

여행에서 돌아와 집 근처 책방에서 츠지 히토나리의 <사랑 후에 오는 것들>를 찾아서 읽었다. 그리고 공지영의 <사랑 후에 오는 것들>를 다시 한번 이어서 읽었다. 하나의 사랑임에도 각기 그 사랑의 이면을 바라보며 엇갈릴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사랑이 내 것처럼 아팠다.

단 한 번 진실한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사랑이 끝나고 나면 그것이 되려 일상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또한 그 주인을 얼마만큼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던 연인의 눈빛, 수줍은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찬찬히 쓰다듬던 연인의 감촉, 이불 아래서 공유하던 그 따스한 체온, 혼자서도 때론 웃음 짓고 때론 전율하던 그 존재감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사랑이 끝나서도 잊지 못한다.

그러나 다행히 베니와 윤오는 7년이란 시간동안 지독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견뎌낸 대가로 당당하게 재회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홍이와 준고로 재회했을 때 그들은 분명 한층 성숙해져 있었고 여유로워져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렇기에 지난날 그 아픈 사랑을 간직할 수도, 다시 꺼내어볼 수도 있게 된 것이다.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않고서 소설가가 꿈이라던 윤오는 일본과 한국을 사로잡은 진짜 소설가가 되어 있었고, 서툰 일본어로 열심히 사랑을 말하던 어린 베니는 회색 정장을 즐겨 입는 어엿한 편집자가 되어 있었다.

7년 전 그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진심이 아니라, 그것을 헤아리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긴 시간 꿋꿋이 가슴에 봉인한 채 지켜온 사랑은 여전히 두 사람을 잇고 있었고 그들은 이제 그 사랑을 꺼내어 다시 키워갈 기회를 만났다.

용기낼 수 없는 사랑을 두고 차라리 혼자가 되기로 결심한 홍이 앞에 기적처럼 준고가 나타났다. 버려진 사랑의 반쪽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간절히 꿈꾸는 해피 엔딩이던가. 언젠가 내가 걸어가는 저 길목 앞에 내 사랑의 반쪽을 쥐고 있는 그가 환하게 웃으며 서 있는 그 날을. 나는 소설 속 그들의 사랑이 대견하고 부러웠다.

사랑을 향해 출발선 앞으로

작가를 딸처럼 여긴다는 할머니의 말처럼 사랑은 단 한번일 뿐, 모든 것은 방황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한 번의 사랑을 알아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때로 용광로 같던 사랑이 식은 뒤에 그것이 헛된 열정에의 집착이었음을 깨닫는다. 또한 맹물처럼 밍밍하던 것이 멀어지고 나서야 삶 전부를 장악하고 있던 진정한 사랑이었음을 깨닫기도 한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베니와 함께 달렸다. 두 권의 책을 두 번씩 읽을 동안 어느새 저녁 무렵이면 온몸으로 바람을 그리워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렇게 달리는 내내 나는 5년 전의 사랑을 떠올렸다. 때로는 운동장 끝에 옛사랑이 서 있는 것을 상상하며 등줄기에 땀이 배도록 달렸고, 어느 날엔 되살아난 상처에 멈춰 서서 눈물을 삼켰다.

공지영과 츠지 히토나리의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을 읽는 것은 내게 몸살을 앓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열이 내려 창문을 연 순간, 나는 이제껏 고집스레 안고 온 마음이 어쩌면 단 한 번의 사랑에 이르기 위한 힘겨운 방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다채롭고 긴 여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높은 산을 오르면서 점입가경의 절경을 만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가장 최고라 여긴 풍경이 한 고개를 넘어서면 무색해지는 이치와 같다.

지금 내 곁에는 새로운 사랑이 서 있다. 지난날 나를 첫사랑이라 말했던 그 남자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치려 했지만 5년 전 그때처럼,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또다시 '사랑'이란 이름의 길 위에 서 있다.

나는 여전히 사랑이 남길 상처가 두렵고 먼 훗날, 이것 또한 마지막 사랑을 위한 방황의 여정이었음을 깨닫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이고 다시 한번 출발선 앞에 섰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다만 최선을 다해 달리는 일이다. 숨이 턱을 치고 올라와 가슴을 옥죄는 때가 올지라도, 가다가 넘어져 피가 날지라도 나를 기다릴 단 하나의 사랑을 향해서!

덧붙이는 글 | 제17회 영광도서 감상문 현상공문 입상작.


사랑 후에 오는 것들 - 공지영

, 소담출판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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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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