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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가 내리면 아직 거둬들이지 않은 밭작물은 치명타를 입는다. 당장 아랫집에 한 달 정도 사람이 없더니 밭에 아직도 캐지 않고 남아 있는 고구마 줄기가 완전히 시들해졌다. 꼭 시래기를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놓은 꼴이다.
길 아래 산음댁 할머니 배추밭을 보니 배추 잎사귀도 많이 일그러졌다. 다행히 우리집 배추는 엊그저께 뽑아다 놓았다. 아내가 다음 주 월요일쯤 김장 담근다고 미리 뽑아놓은 게 잘된 일인 듯싶다.
서리에는 몇 개의 접두사가 붙는다. 무서리, 된서리, 늦서리 등이다. 무서리는 ‘물서리’에서 ‘물’의 ‘ㄹ’이 탈락하여 무서리가 됐는데, 그해의 가을 들어 처음 내리는 물처럼 묽은 서리를 말한다.
된서리는 무서리의 반대로 늦가을에 아주 되게 내리는 서리를 말한다. 이 된서리는 아직 거둬들이지 않은 밭작물에 타격을 준다. 우리가 가끔 ‘된서리를 맞다’는 말을 쓰는데 이는 바로 된서리 맞은 뒤의 농작물의 모습처럼 큰 타격을 받았을 때 쓰는 말이다.
또 봄이 한창일 때 내리는 늦서리도 농작물에 치명타를 준다고 한다. 서리로 인한 가장 큰 피해가 바로 늦서리로 인한 것이다. 과수원에 한창 꽃이 필 무렵 느닷없이 내리는 늦서리로 하여 열매가 제대로 맺히지도 않고 맺히더라도 상품성이 떨어지는 열매가 맺히게 된다.
차에 시동을 걸어놓고 예열하고 있는데 마침 산음 어른께서 지나가신다. 인사 삼아, “오늘 서리 많이 내렸습니다”하니, “그렇네요”하신다. “배추를 아직 뽑지 않았던데 피해 입지 않겠습니까?”하니, “어차피 병 든 것, 돈도 되지 않는데…”하신다.
그때 해가 솟아오르기에,“이제 곧 서리가 다 녹겠습니다”하자, 어른께서 엉뚱한 말을 하신다. “해 뜨면 서리 녹듯이 그렇게 갔으면 좋겠는데….” 처음엔 그 말뜻을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깨달았다.
비나 눈이 내릴 때는 기척이 있다. 비는 소리로, 눈은 모습으로. 그런데 서리는 아무 기척이 없다. 다음날 아침 눈으로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간밤에 서리가 내렸구나 하고 알 수 있을 뿐. 그 서리는 다시 해가 솟아오르면 금세 사라진다. 언제 왔느냐는 듯이.
마을 어른들은 다들 한 군데씩 앓고 있다. 암 치료하시는 분, 허리가 아파 구부정하신 분, 중풍으로 고생하시는 분 등. 이 분들뿐 아니라 나이가 든 이들의 가장 큰 소원은 자식들에게 피해주지 않고 조용히 돌아가시는 거리라. 그러기에 ‘떠오른 해에 서리 녹듯이 가고 싶다’는 말을 하고.
서리 내린 날 아침, 삶보다 죽음이 가깝게 여겨지는 건 무슨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