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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5월 2일, 워싱턴 덜레스 공항에서 입양될 어머니 품에 안긴 애날리아. (맨 오른쪽)
1988년 5월 2일, 워싱턴 덜레스 공항에서 입양될 어머니 품에 안긴 애날리아. (맨 오른쪽) ⓒ 한나영
"부모님을 찾고 싶어요. 위탁모도 찾고 싶고요. 서울에 있을 때 저를 돌봐준 분과 생모를 만나고 싶어요."

애날리아는 그의 부모를 찾고 싶어한다. 그리고 울산에서 태어난 그를 입양시키기 전까지 서울에서 돌본 위탁모도 찾고 싶어한다.

위탁모도 찾고 싶어요.
위탁모도 찾고 싶어요. ⓒ 한나영
애날리아는 왜 지금에 와서 생모를 찾고 싶어할까. 자신을 길러준 좋은 양부모, 여동생과 함께 단란한 '가족'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제 핏줄을 찾으려고 하는 건 사람이면 누구나 갖는 인정일 것이다. 왜 찾으려고 하냐고 굳이 질문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먼 이국 땅에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부모를 애써 찾으려고 하는 애날리아에게 이런 당연한 이유 말고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일까.

가족도 이름도 생일도 없이 애날리아는 버려졌다

@BRI@"제 삶엔 메워야 할 구멍이 있어요. 그 구멍을 메울 해답이 제게는 필요해요. 제가 아버지를 닮았는지, 아니면 어머니를 닮았는지, 또 제 가족들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어요. 저는 그 분들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제 가족의 역사도 궁금하고요."

눈부시게 화려한 스무살 청춘 애날리아에게는 다른 사람이 모르는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가슴 한 편에 뻥 뚫린 구멍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는 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저를 포기하게 되었는지, 저를 포기할 당시 어머니의 삶은 어떠했는지 알고 싶어요. 또 어머니가 저를 포기하려고 결심했을 때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갖고 계셨는지, 아직도 아버지가 어머니의 인생에 함께하고 계신지…. 그 분들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아요."

"제게는 메워야 할 구멍이 있어요." 애날리아의 이메일.
"제게는 메워야 할 구멍이 있어요." 애날리아의 이메일. ⓒ 한나영
생명은 신비다. 경이로움이고 고귀함이다. 그러기에 모든 생명은 축복을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런 생명의 축복 잔치에 끼지 못한 생명이 있었다. 바로 첫 돌을 코 앞에 둔 애날리아였다.

"저는 생후 8개월 되었을 때 입양을 위해 위탁모 가정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제 이름(신정림)은 고아원에서 지어졌는데 원래는 이름도 없었던 것 같아요. 저의 생일도 진짜인지 알 수 없고요.

제가 입양되면서 가지고 온 서류에는 제 부모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어요. 저는 울산의 한 성당 계단에 버려졌다고 해요. 사람들이 저를 데려다가 8개월 동안 키웠고 입양을 위해 서울로 보낸 것 같아요."


애날리아는 서류상으로 버젓이 '신정림'이라는 제대로 된 이름이 있다. 하지만 애날리아의 아버지가 정말 신씨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신씨가 아닐 가능성이 더 커보인다. 왜냐하면 아무런 흔적 없이 애날리아는 몰래 버려졌기 때문이다.

부모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고 태어난 날짜마저 정확하지 않아 어쩌면 '잉여인간'처럼 태어난 애날리아다. 그녀에게 확실한 것은 그녀가 세상 사람들에게 발견된 날짜뿐이다. 어찌 보면 참 기구하다고 할 수 있는 인생이리라. 하지만 그런 기구한 삶을 자신에게 물려준 부모를 애날리아는 찾고 있었다.

조국이 버린 딸 곱게 길러준 미국 엄마

"헬로."

이른 저녁에 전화를 받았다. 애날리아의 양어머니로부터 온 전화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애날리아 엄마 데브라예요. 우리 애날리아로부터 나영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고마워요. 그런데 애날리아 입양 서류를 보고 싶다고 했다면서요?"

애날리아가 생모를 찾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애날리아에게 입양 서류에 대해 물었다. 부모를 찾고 싶다고 하는데 아무런 단서가 없기 때문이었다. 애날리아가 가져온 것은 입양 당시의 사진과 위탁모 사진, 비행기표, 그리고 동방아동복지회에서 받은 '보건수첩'과 <입양아 가족을 위한 기본적인 어휘집>, 그리고 'Facts about Korea'라는 한국 관련 책자가 전부였다.

"제 입양 서류는 모두 부모님이 보관하고 있어요.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해서요. 제가 한 번 부모님께 여쭤볼게요. 그 서류들을 보여줄 수 있는지…."

그런 얘기를 며칠 전에 주고받았는데 바로 전화가 온 것이었다. 나는 기대하지 않았던 애날리아 어머니 전화에 조금은 당황해하면서 먼저 감사의 인사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애날리아로부터 부모님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사랑으로 잘 키워주셨다고요. 고맙습니다. 애날리아가 아주 곱게 자랐더군요. 감사합니다."

애날리아가 마치 내 딸이라도 되는 양 그동안 잘 키워준 엄마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진실한 감사였다. 나는 애날리아의 조국 대한민국이 버린 딸을 곱게 길러준 미국 엄마에 대해 채무자와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런 죄송한 마음이 내게는 있었다.

"그런데 왜 애날리아 입양 서류를 보려고 하는 거죠?"

"애날리아에게 제 얘기를 들으셨다고 하셨는데요. 제가 한국의 한 인터넷 신문에서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고 있거든요. 애날리아가 생모를 찾고 싶다고 하는데 혹시 제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해서요. 애날리아에 대한 정보가 많으면 부모를 찾는데 좀 수월하지 않을까요."

"그래요. 그런데 애날리아가 부모를 찾을 수 있을까요? 애날리아는 부모를 잃은 게 아니고 버려진 것인데요. 그리고 성당 계단 앞에 버려졌다고 말했다는데 그건 아니에요. 제가 보관하고 있는 입양 서류를 복사해서 보낼 테니 읽어보세요. 그리고 언제 한 번 시간을 내서 우리 만나요."


돌도 안 된 아기 '신정림' 일가 창립 편제, 호주가 되다.
돌도 안 된 아기 '신정림' 일가 창립 편제, 호주가 되다. ⓒ 한나영
텅 빈 등본엔 돌도 안 된 젖먹이가 호주

"제가 누구를 닮았는지 알고 싶어요."
"제가 누구를 닮았는지 알고 싶어요." ⓒ 한나영
나는 애날리아가 일하는 토요일에 그가 자원봉사하고 있는 중고알뜰가게 '트라이드 앤 트루'를 다시 찾았다. 애날리아의 표정은 밝았다. 애날리아는 양아버지가 출력해 주었다며 내가 보내준 <오마이뉴스> 기사를 들고 왔다. 애날리아는 가족들도 이 일에 아주 흥미가 있다고 내게 전했다.

애날리아는 이 기사를 매니저인 데브와 손님들에게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한국어로 쓰인 기사 내용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사진을 보면서 신기해했다. 그리고 애날리아가 부모를 찾기 바란다는 기원의 말도 아낌없이 해주었다.

확실히 우리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우리 같았으면 입양 사실을 쉬쉬하면서 숨기거나 부끄러워했을 텐데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애날리아 역시 당당하게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밝혔다.

애날리아는 어머니가 보냈다는 입양 서류를 내게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한글과 영문으로 된 '호적등본'이 있었다. 텅 비어 있는 쓸쓸한 등본이었다. 전 호주와의 관계, 부모의 이름, 주민등록번호가 없는 텅 빈 호적등본을 애날리아에게 설명해 주고 있자니 내 가슴도 뭔가가 텅 빈 듯 찬바람이 불어왔다.

한 아이가 분명 태어났다. 그런데 아이의 아버지, 어머니 이름이 없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갖는 주민등록번호도 이 아이에게는 없다. 게다가 출생연도도 '추정'이라고 하니 도대체 이 아이는 언제 태어난 걸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더욱 가슴이 아픈 건, 이 어린 젖먹이가 당당히(?) '호주'로 등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돌도 안 된 핏덩이가 법원의 허가에 의해 성을 '신'으로 본을 '한양'으로 창설했고, 구청장의 조서에 의해 '일가'를 창립하여 편제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이 어린 젖먹이에게 이런 엄청난 책무를 맡겼단 말인가.

애날리아가 보관하고 있는 서류에는 애날리아가 자신의 조국 대한민국으로부터 어떻게 멀어져 가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호적등본', '보호시설에 있는 미성년자인 고아의 후견인 지정', '친권 포기 및 입양 동의서', '입양 이민 동의서'.

애날리아는 이렇게 '코리아'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보호시설에 있는 미성년자인 고아의 후견인 지정.
보호시설에 있는 미성년자인 고아의 후견인 지정. ⓒ 한나영
친권 포기 및 입양 동의서.
친권 포기 및 입양 동의서. ⓒ 한나영
입양 이민 동의서.
입양 이민 동의서. ⓒ 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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