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의 대다수가 인터넷, 친구나 선배를 통해 성 지식을 얻는 것에 대해 인구보건복지협회의 성 상담 전문가 오세의씨는 "그릇된 성지식을 사실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고 말하고 "그뿐 아니라 올바른 가치관이 정립되기 전에 인터넷 등에 떠도는 자극적이고 어두운 성을 먼저 알게 되어 성에 대해 수치스러워하게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성 의식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건 마찬가지. "현재 우리나라 대학생의 올바른 성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58.1%가 '낮다', '매우 낮다'고 답해 대학생 스스로 자신들의 성 의식 수준에 낙제점을 주고 있었다.
입시 그늘에 가려진 성 교육
대학생들이 성에 무지한 이유 중 상당 부분은 중고등학교 때 제대로 된 성 교육을 받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입시 불을 끄는 데 급급해 성 교육은 뒷전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외대에 다니는 김형철(23)씨는 "중고등학교 때 성교육은 '수박 겉핥기 식'이었다"고 술회했다. "어쩌다 한 번 비디오를 보여주는 게 전부였고 수능에 나오는 과목의 수업에 비하면 얼렁뚱땅 넘어갔다"고 덧붙였다.
교육인적자원부(아래 교육부)에서는 초중고교 성교육 시간을 한 학년에 10시간 내외로 권장하고 있다. 성 지식, 양성 평등의식, 성 희롱, 성 폭력, 성 매매 예방 등 전 분야에 걸친 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지난 8월 서울 소재 10개 고등학교의 성교육 실태를 알아본 결과 '한 학년 당 10시간'의 교육 방침을 지키고 있는 학교는 단 한 곳도 없었다.
S고등학교의 한 보건교사는 교육부 방침에 대해 "입시 중심의 수업 때문에 성 교육 시간 확보가 매우 어렵다"고 말하고 "한 학년에 한두 시간 확보하는 것도 전쟁"이라고 토로했다. 밝은청소년지원센터 학교팀장 이학씨는 "짧은 시간 안에 성 지식을 전달하기도 바쁘기 때문에 올바른 자아정체감이나 성의식을 형성하는 것까진 꿈도 못 꾼다"고 말했다. "성 교육 할 시간에 국영수 한 자라도 더 봐서 수능 1점이라도 더 따려는 게 현실인데 이런 교육 아래서 자란 대학생들이 성에 대해 제대로 알 리가 있겠느냐"고 오세의씨는 이야기했다.
교육부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대학 성 교육
혼란스러운 학생들을 이끌어 줄 곳은 대학에 와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교육부의 권고 사항인 성교육 방침이 초중고교 학생들에게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의 성교육은 학교 재량에 맡겨진다. 교육부의 한 교육행정주사는 "대학생은 성인이므로 자율적으로 성교육을 해야 한다고 간주해 교육부에서 마련한 성교육 방침이 전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교육부와 대학생 성 교육과는 거리가 있다"고 덧붙였다.
학생과 교직원을 대상으로 한 성 희롱, 성 폭력 예방교육에 대한 규정만 있지만 이 또한 모호하다. 교육기관은 의무적으로 교육을 실시해야 하지만 교직원과 학생 등 구성원에게는 교육을 받는 것이 필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 성희롱성폭력상담소의 하혜숙 전문위원은 "(법에) 교육을 하라는 의무만 있고 받으라는 의무는 없으니 모순이 생긴다"고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성 희롱, 성 폭력 예방 교육이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학교, 학생 모두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성 교육이 필수 과목이 되면 좋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이고, 대학까지 왔을 정도의 지적인 수준이나 연령을 보면 한 번은 꼭 짚을 과제이기도 하다." (정유성 서강대 사회교육과 교수)
대학생들 역시 성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대학생 296명의 설문 응답 중 성 교육이 필요하다는 대답이 82.1%(243명)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 가운데 88.9%(216명)는 성 교육 강의를 듣고 싶다고 하였다. 오세의씨는 "학교로 특강을 나가보면 대학생들의 반응이 가장 좋다"고 말하고 "학생들끼리 돈을 얼마씩 걷어서 특강을 여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정작 대학 내에서 성 교육 관련 강의나 특강을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정유성 교수는 "교육부의 방침도 없는데다 대학 당국은 학생들이 필요한 교양 교육보다는 전공 지식을 가르치는 데 치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하고 "학교와 학생의 이해가 상충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성 교육 관련 강의 자체가 부족할 뿐 아니라, 개설돼 있더라도 인기 수업이라 듣기 힘들다는 게 학생들의 말이다. "성 교육 수업을 들으려고 했지만 수강 인원이 다 차버려서 놓쳤다"는 한 학생은 "다음 학기를 노려볼 계획"이라고 대답했다.
교수들도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이화여대 의예과의 정혜원 교수는 "대학생들은 피상적인 교육이 아니라 실질적인 성 교육을 받아야 하지만 연구와 전공 수업을 병행하는 교수들이 새로운 내용의 수업을 만드는 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 "강의 개설 등 대학 차원에서 마련해둔 바탕도 없는 상황에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기엔 무리가 따른다"는 설명. 정유성 교수는 "누가 가르칠 것인지도 문제"라고 했다. "성 교육이란 성 지식만 가르치는 게 아닌 만큼 심리, 사회 등 각 분야 교수들이 모여 가르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서로 바쁘고 시간 맞추기도 어렵다"고 현실적 어려움을 토로했다.
대학에서 성 교육 접할 기회 많아져야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고등학생의 대학진학률은 80%를 넘었다. 대학은 고급 인재를 위한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대중 교육기관으로 변모했다. 이화여대 간호과학대의 하주영 교수는 "대학에서 중고등학교 때 정립된 기본적인 성 지식을 바탕으로 성에 대한 '토론의 장'이 열려야 한다"고 말했다. 하 교수는 "성은 개인적인 성향보다 사회문화적인 교육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고 말하고 "제대로 된 성 교육이 대학에서마저 이뤄지지 않는다면 성 범죄 등 사회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학생들은 성인기의 시작점에 있다. 신체적으로 성 호르몬이 최대에 도달하고 정서적으로는 이성에 대한 관심이 극대화된다. 이 시기에 바람직한 성 교육을 접한다면 교육 내용을 능동적이고 효율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교육자들의 생각이다.
취재를 위해 만난 교육자들은 고등학교 때까지 성 교육이 금지 사항 위주로 교육되는 '네거티브 캠페인(negative campaign)'이라면, 대학에서는 성을 긍정적이고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포지티브 캠페인(positive campaign)'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또 대학생들이 이러한 교육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서울대 성희롱성폭력상담소의 하혜숙 전문위원은 "우리나라의 교육 환경상 청소년기가 대학까지 유예되며 중고등학교 때는 자아나 성의식 형성을 고민할 기회가 제대로 없다"고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중고등학교 때 성 교육보다 대학에서의 성 교육이 더 중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 위원은 "대학의 성 교육은 잘못 형성된 의식을 바로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