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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이당
유교문화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마당에 아직도 종손이라는 굴레로 고통 받는 이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단정학이 움직이는 것 같은 몸짓으로 제례를 올리는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음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상룡의 아버지, 사랑 없는 결혼으로 불행한 삶을 마친 해월당 어머니, 상룡의 생모, 아들을 낳지 못한 죄로 집에서 쫓겨난 달시룻댁과 그녀의 딸 정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피해자들이다.

상룡의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정해준 배필과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다. 취직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면서 상룡을 낳았다. 그러다 별안간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해월당 어머니와 다시 혼례를 치른다. 물론 상룡의 생모는 거액의 돈을 챙기고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아마도 상룡의 생모가 아버지에게 이별을 고했을 것이다. 모진 생모를 잊지 못하는 아버지가 불쌍할 따름이다.

아버지는 행복하지 않았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상룡의 생모 때문에 그렇다고 할아버지를 거역할 수도 없어 자살을 택한다. 그러니 해월당 어머니는 무슨 죄로 자식도 없이 조씨 문중에서 한평생을 보내야 하는가.

상룡도 불행한 건 마찬가지였다. 적자 아닌 적자로 살아야 하는 삶이 온전할 리 없다. 완고한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일이 녹록치 않음은 자명한 사실.

"개뿔 잘난 것도 하나 없는 내가 그나마 내세울 것이라고는 유서 깊은 가문의 종손이라는 것뿐이었다. 이 좁은 마을에서 할아버지의 재력을 배경 삼아, 효계당의 종손이라는 이유로 어딜 가나 특별대우를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결국 나는 안락한 고치 속에서 앙앙불락하는 살결 고운 누에에 불과했다." (111쪽)

제대 후 복학한 상룡은 휑뎅그렁한 종가에서 그럭저럭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정실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정실은 어머니와 함께 종가의 살림을 맡아 도와주는 부엌데기다. 효계당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그 역할이 더 커진 셈이다. 다리가 온전치 못한 데다 뚱뚱하고 못생기고 그야말로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박색이었다.

정실은 유년 시절부터 옥돌 같이 수려한 외모를 가진 상룡을 흠모하고 있었으나 상룡은 반대였다. 학교 아이들이 둘이 한 집에 산다는 이유로 놀림이라도 하면 매우 불쾌해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못생기고 뚱뚱한 보리문디 가스나한테 느껴지는 사랑의 감정도 예쁜 여자한테 느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에게 사랑은 하나였고 그건 정실을 향했다. 그도안 자존심 때문에 인정하지 않았을 뿐, 나는 정실에게 질투와 독점욕, 응석 부리고 확인하고 싶은 마음 등의 일상적인 연애 감정을 모두 느꼈다. 그리고 언제나 한결같이 우직하게 돌아오는 사랑과 믿음의 메아리는 끝없이 목말라 하고 두려워하며 의심하는, 내 상처입은 마음에 더할 나위 없는 치료제가 되어 주었다.

@BRI@태어나면서부터 불신과 배반, 유기와 경멸에 절어 살아왔던 나는 흔히 연애에 동반되는 감정의 줄다리기를 견뎌 낼 심적인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근본을 밑바닥까지 알면서도 무조건적이고 전폭적인, 무모하고 맹목적이라 할 수 있는 애정과 신뢰를 보내주는 사람,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건 정실뿐이었다." (172쪽)


친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지 못한 상룡은 언제나 정에 굶주려 있었다. 그런 상룡에게 정실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정실은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상룡은 할아버지에게 사실을 이야기했다. 예상대로 할아버지는 노발대발하며 정실을 쫓아내 버렸다.

이제 집은 더 휑뎅그렁하게 되었다. 아무리 애원해도 할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정실과 함께 도망할 수 없었던 무기력한 자신이, 경제력 없는 학생 신분이 상룡을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정실을 내쫓음으로써 소설은 파국 국면에 접어든다. 상룡이 해석하던 옛편지들은 문중의 누가 될 것이라 여겨 할아버지는 이것들을 태우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를 제지하던 상룡과 몸부림이 일어나자 삽시간에 불은 효계당의 기둥을 모조리 불기둥으로 만들어버리며 소설은 막을 내린다.

효계당이 사라짐으로써 종가의 도를 이어가야 하는 명분도 사라지게 되었다. 상룡은 정실을 찾을 수 있을까. 소설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정실이다.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자신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지 않았다. 결혼은 물론이고 박복하게 태어난 신세를 한탄하며 행복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인생만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뜻밖에 상룡의 사랑을 받고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정실은 꿈인 듯싶다.

명분에 휘둘려 살기에 우리의 삶은 너무나 짧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삶, 자신이 주체가 되는 삶을 영위하고픈 게 인간의 본능이라는 걸 다시금 일깨워주는 소설이다. 다수의 관심에서 비껴가기 쉬울 소재로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다니 저자의 능력이 새삼 놀랍다. 저자의 소설마다 굵직한 여운이 아로 새겨진다.

달의 제단 - 제6회 무명문학상 수상작

심윤경 지음, 문학동네(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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