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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앞 묘지. 까막눈으로 봐도 명당 비슷하다.
우리 집 앞 묘지. 까막눈으로 봐도 명당 비슷하다. ⓒ 조명자
전남 담양으로 4년 전에 처음 이사 와서 제일 거슬렸던 것이 대문 앞쪽으로 바라보이는 묘지였다. 그것도 희한하게 마을 뒷산에서부터 쭉 내려와 뭉툭하게 솟은 언덕 끝이 우리 집 앞에서 멈추었는데, 바로 그 위에 봉분이 너무 커서 고분으로 착각할 정도로 큰 묘지를 조성한 것이다.

동네 한가운데 왕릉처럼 우뚝 솟은 묘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뭔 사연이 있기에 마을의 이미지를 좌우하는 정중앙에 묘지 쓰는 것을 허용했을까.

내 집 창문을 통해 바라보이는 산소를 볼 때마다 찜찜해지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던 차에 마을에서 제일 연세도 높으시고 풍수에 일가견이 있다는 할아버님을 만나 묘지조성에 대한 내력을 여쭙게 되었다.

@BRI@"저거이 아주 명당 터야. 군내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좋은 터지. 내가 안즉 어렸을 때 묘를 썼다네. 저 집안이 군수도 나고, 국회의원도 난 그런 집안이지. 마을 사람들에게 술과 고기도 실컷 먹이고 관광도 시켜주고 하면서 묘지를 썼다네. 뭐 제 땅에 제 조상 묘 쓴다는 데 말릴 재간 있었겠어?"

"그래요? 할아버지 그런데 명당에 묘 쓴 저 집안 후손들 아직도 잘 살고 있어요?"

"그럼…, 서울에서 사장도 하고, 변호사도 있고, 모다들 짱짱하게 산다 하드만."


벌써 수십 년 묵은 산소니 동네 어른들에겐 마을 가운데 으레 서 있는 당산나무 정도로 익숙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 날 낯선 마을에 뚝 떨어진 나는 마당에서 빤히 바라보이는 그 산소가 어찌나 무섭던지 한 1년간 마음고생깨나 했던 기억이 있다.

묘지 문제로 마을 사람 간에 원수지간 되는 일도...

이웃 마을 입구의 경고문.
이웃 마을 입구의 경고문. ⓒ 조명자
그런데 지난 여름, 옆 마을에 사는 지인이 묘지 문제로 마을 사람과 대판 싸우고 원수지간이 된 곤욕을 치렀다. 그 지인도 나처럼 외지에서 들어가 마을 맨 끝쪽 저수지 밑에다 집을 지은 사람인데, 그 집 앞산 임자가 집 코앞에다 돌아가신 아버지 산소를 조성하려 한 것이다.

매일 오가는 진입로 근처에 산소를 쓰다니. 집주인으로서 당연히 죽기 살기로 막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더구나 매장 법에 명시된 조항에도 집으로부터 500m 이내에는 묘를 쓸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니 법적으로도 아무 하자가 없는 요구였다.

그러나 유족 측도 만만치 않았다. 그 산은 선조 대대로 내려온 자기네 선산이고 더구나 그 산 앞쪽엔 이미 1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유가족의 어머니가 묻혀 계신 곳이니 마나님 곁에 영감님이 묻히는 것은 당연지사. 더구나 망자가 먼저 가신 마나님 바로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까지 남겼으니 자식으로서도 고인을 그 자리에 모시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양쪽 입장이 팽팽하니 결국 관이 동원될 수밖에 없었고, 법규에 따라 유족들은 눈물을 머금고 망자를 다른 자리로 모시게 되었다. 한바탕 난리법석을 떤 끝에 목적은 달성했지만 지인이라고 마음 편할 리가 없었다.

싸움은 싸움이고 도리는 도리라 뒤늦게 조의금을 들고 찾아갔더니, 유족들이 쌍욕을 하며 돈 봉투를 땅바닥에 패대기치더란다. 하기야 역지사지로 뒤집어 봐도 얼마나 이가 갈리고 원통하겠는가. 지인의 하소연을 들으며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론 두렵기까지 했다.

우선은 돌아가신 분의 마지막 소원을 외면한 것이 무엇보다 걸렸다. 더구나 그 자리를 소원하신 이유가 먼저 가신 마나님 곁에 묻히고 싶다는 것이라니 야박하게 법규만 따지는 게 과연 잘하는 일인가도 싶었다.

지인의 입장에선 하나도 잘못한 게 없지만 혹시나 망자의 원혼이 지인을 괴롭히지 않을까 하는 허무맹랑한 상상도 두려움을 더했다. 쓸데없는 걱정을 늘어놓는 내게 지인도 사실 그 부분이 제일 꺼림칙하다는 마음고생을 토로했다.

어쨌거나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정서가 이분법으로 극명하게 나뉘는 우리에겐 죽음은 곧 두려움 아니면 혐오다. 내가 지인 입장이라도 내 집 코앞에 산소자리가 들어서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게다. 그 친구가 겪은 곤욕을 바라보며 혼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동네 맨 앞줄에 살고 있으니 적어도 내 집 주변에 묘자리 들어설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묘지에 관한 또 다른 관습을 얼마 전에 목격했다. 우리 마을 개울 건너편에 사시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할아버지 꽃상여가 예상을 뒤엎고 한참을 에둘러 돌아가는 뒷산 중턱으로 모셔지는 것이었다. 그 할아버지 댁 바로 위에 층층이 조성된 가족묘역이 정갈하게 관리되던 것을 본 나는 당연히 할아버지도 그곳에 모셔질 줄 알았었다.

가까운 가족묘 놔두고 굳이 외진 산 중턱까지 가신 이유가 혹시 명당 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레짐작했는데, 초상 치른 뒤 답례 인사를 하러 온 그 집 아들을 통해 그 이유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생 송장은 집 가까이 모시는 것이 아니래요. 그래서 다른 곳에 모셨다가 육탈이 된 뒤 이장할 생각이구먼요."

그제야 묘지에 대한 여러 생각이 말끔히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자기 집 뒷산에도 금방 돌아가신 부모 묘를 쓰지 않는 판인데, 하물며 남의 집 코앞에야….

이러다간 사람하고 사는 게 아니라 산소하고 이웃하며 살게 되는 것 아닐까

촌에 살면서 두 가지가 마음을 어지럽힌다. 하나는 날이 가면 갈수록 사람 수가 줄어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면 갈수록 장의차가 자주 찾아온다는 것이다. 내가 이사 온 뒤로 벌써 마을 어른들이 다섯 분이나 돌아가셨다. 그리고 어른들이 대부분 연로한 편이니 십여 년 이내에 줄줄이 초상 치를 일만 남은 것 같다.

외지에 뿔뿔이 흩어져 사는 마을 어른들의 자손들. 삶의 터전이 도시인데 고향 그립다고 홀랑 귀향하기는 쉽지 않을 일이다. 그러니 갈수록 농촌인구는 줄어들고 묵정밭만 늘어나게 생겼다.

그리고 한편,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야산 곳곳 새로 조성되는 묘지가 장난 아니다. 마을에서 돌아가신 분들은 물론이고, 외지에 사신 분들까지 돌아가시면 무조건 고향으로 내려온다. 그것도 사람 눈 밖 벗어난 호젓한 산 속이 아니고, 꼭 길가에서 빤히 보이는 자리 아니면 산비탈 밭 그런 곳에 모신다.

찾고 싶은 묘지, 우리도 이럴 수 없을까?(짤쯔부르크의 묘지)
찾고 싶은 묘지, 우리도 이럴 수 없을까?(짤쯔부르크의 묘지) ⓒ 조명자
올해는 유난히 장의차가 많이 들락거려 이러다간 사람하고 사는 게 아니라 산소하고 이웃하며 살게 되는 것 아닐까 무섬증까지 들 정도였다. 산자가 떠나고 죽은 자가 돌아오는 것은 인력으로 막을 수 없는 일.

그러나 망부모를 모시고 고향 찾아오는 사람들이 고향 사람들을 위해 조금만 배려해 주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다. 마을 인가 가까이엔 되도록 피하고, 숲 속 햇살 밝은 양지 터에 고인을 모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수천 미터 높이 솟은 고산도 등산하겠다고 돈 들여가며 찾아다니는 판에 1년에 한두 번 찾아오면 다행인 성묘 길. 몇 백 미터 더 오른다고 발바닥 부르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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