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수유역 주변 고층 빌딩 사이로 십자가 달린 15층짜리 빌딩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여러 간판 사이로 '수유리교회'라는 문구도 눈에 띈다. 출퇴근길에 마주치는 이 빌딩을 보면서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이곳에 교회를 임대했을까' 생각했다. 으레 교회라면 주택가로 가기 마련인데, 뜨내기만 북적대는 지하철역 앞에 교회를 세워 어쩌자는 건가 싶었다. 세 들어 산다면 어떻게 그 엄청난 월세를 감당하나 싶었다.
최근 기독청년아카데미가 이 건물 지하 2층 커피숍 '제리코'에서 연 일일찻집에 들렀다가 이 건물의 주인이 수유리교회임을 알고 더욱 놀랐다. 보통 그 정도 재력이면 아파트 밀집 지역이나 공기 좋고 주차장 넓은 북한산 자락에 넓게 자리 잡는 게 한국교회에서 유통되는 '상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저곳에 교회가 있을까' 궁금함이 밀려왔다.
그즈음 수유리교회에 대한 소문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제리코는 수유리교회가 지역 주민을 위해 개방한 카페라는 것. 그래서 가난한 시민단체와 청소년들의 행사 때는 무료로 빌려준다고 했다. 몇몇 교회들이 지역 주민을 위해 문화 공간으로 이런 카페를 교회 안에 차리고 저렴하게 음료와 먹을거리를 제공한다. '마음씨 넉넉한 부자 교회구나' 싶었다.
@BRI@이 빌딩 12층부터 위로 세 층은 수유리교회가 쓰는데, 기도실은 항상 개방하고 시간만 겹치지 않으면 각종 세미나실은 물론 본당까지 지역 주민들에게 빌려준다고 했다. 공연을 할 수 있도록 본당을 설계했고 본당에 설치된 음향, 영상 시설이 방송국 수준의 최고급 사양이라는 이야기도 들렸다.
호화스럽게 꾸미는 교회는 많지만, 안방과도 같고 성스럽게 여기기까지 한 예배당을 "너희도 맘껏 쓰라"고 이웃에게 내놓기는 쉽지 않다. 그냥 마음씨가 좋아서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는다. 나름의 철학이 없으면 하기 힘든 일이다.
게다가 수유리교회는 보수적인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소속이고, 담임 방인근 목사는 60세를 넘겨 은퇴를 얼마 남기지 않은 노목사였다. 교계 언론에 실린 수유리교회에 대한 기사와 방 목사의 칼럼을 살펴본 뒤 인터뷰를 요청했다. 1월 4일 13층 목회자실에서 담임 방인근 목사를 만날 수 있었다. 방 목사는 부목사인 허정회 목사를 불러 공동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우리 교회는 이중적이다"
방 목사의 첫마디가 "수유리교회는 이중적이다"였다. 그는, 신앙은 악착같이 보수를 견지하지만, 교회와 세상이 만나는 문화적 방식은 철저히 세속적이라는 토를 달았다. 그가 말하는 보수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르는 고백을 기독교의 핵심으로 보고, 그 고백에 근거한 종교성을 망가뜨리지 않고 잘 지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예배 가운데 한 번은 천주교의 미사에 가까운 장엄한 예배 양식을 갖출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세속은 교회가 지역 사회를 정복하겠다는 마음으로 다가가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교회도 변하겠다는 자세다. 수유리교회 본당에 들어서면 그가 말하는 세속이 뭘 의미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극장식 의자에 공연장을 방불케 하는 구조, 인테리어까지 300석 규모의 공연장에 들어가는 기분이다. 그는 "어차피 이웃과 함께 쓸 공간인데 교회 티를 낼 필요가 뭐가 있느냐"고 말했다.
이러한 이중성을 두고 설교비평가 정용섭 목사(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는 <월간 활천> 2007년 1월호에서 "성결교회의 원초적인 복음을 강조하면서도 목회 프로그램은 매우 현대적이다, 그가 수성타워를 중심으로 펼치고자 하는 21세기 목회 전략은 386세대보다 앞서 있다"고 평가했다.
처음 본당을 개방할 때는 일부 교인들이 다른 곳은 몰라도 본당은 내주는 것을 꺼려했다고 한다. 교인들로서는 교회 밖 사람들이 자기들 공연이나 행사를 치른다고 '거룩한' 강단에 오르내리는 게 마뜩찮았던 모양이다. "어쩔 거야. 모른척하고 내 일을 하는 거지." 우렁찬 목소리로 걸쭉하게 뽑아내는 말에서 스스로 말하는 '촌놈'의 옹고집이 묻어났다.
'환상의 콤비'가 아파트촌으로 떠나지 않은 이유
다행히 그의 곁엔 '환상의 콤비' 허정회 목사가 있었다. 20년이 넘는 나이 차에도 두 사람은 함께 목회하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주었다. 특히 교회를 건축하는 과정에서 빛을 발했다.
교회를 이전할 것인지 그 자리에 다시 지을 것인지 논의가 시작되자, 교인들은 수유역 5번 출구 바로 앞에 있는 땅을 팔아 주택가나 공기 좋은 곳으로 옮기길 원했다. 교인들의 요구에 밀려 우이동 북한산 자락으로 답사를 다닌 적도 있다.
그러나 두 목사는 수유리교회가 수유역에 남아 '도심 속의 영성의 샘' 기능을 감당하자고 뜻을 모았다. 다들 교회가 커지면 전원으로 떠나고 성장을 위해 아파트 밀집 지역으로 몰리는데, 사람들이 출퇴근하다가 쉬었다 갈 수 있는 교회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취지는 공감하지만 그게 꼭 우리 교회여야 하느냐'는 볼멘소리도 나왔지만, 두 목회자가 한 마음으로 교인들을 설득했다.
수유리교회가 기존 건물을 헐고 수성타워를 짓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방 목사는 건축에 대한 모든 책임을 허 목사에게 일임하고 보고만 받았다. 방 목사는 허 목사와 건축위원장 등 소수 관계자를 제외한 그 어떤 교인도 공사장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할 정도로 건축과 연관된 잡음을 미리 막았다. 물론 자신도 그 약속을 지켰다.
방 목사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은 허 목사는 투명하고 깨끗한 건축을 위해 커피 한 잔 얻어먹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일을 처리했다. 인부들이 너무 삭막하다며 밥이라도 먹자고 하면, 밥값은 허 목사가 지불했다. 시공사에는 건축비를 내리는 대신 리베이트는 받지 않는다고 미리 알렸다.
공사가 끝날 즈음 "혹시나 교회가 요구할까 싶어 남겨둔 돈이 있으면 수고한 일꾼들에게 보너스로 주라"고 말했다. 허 목사는 "시공사 현장 책임자와 일꾼들도 처음엔 반신반의하다가 나중에는 '이런 교회도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일을 해줬다"고 말했다.
방 목사는 "이렇게 철저하게 원칙을 지켰기에 시공사가 두 번이나 부도가 나는 위기 속에서도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첫 번째 시공사가 부도났을 때 '어깨'들이 와서 인터넷에 폭로하겠다고 협박했을 때 그렇게 하라고 했다, 뭐 나올 게 있어야지, 나중에는 그들이 나서서 우리를 도왔다"고 말했다.
교회 건축의 목적, 이웃에게 열어놓기
교회 내부의 배치와 인테리어에도 이웃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묻어난다. 교회 사무실이 들어선 13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정면에 기도실이 보인다. 수유리교회 교인이 아니어도 '주인' 눈치 보지 말고 기도하고 가라는 뜻이다.
허 목사는 "교회에 들어서자마자 사무실을 만나는 것이 너무 삭막해 피하고 싶었다, 기도실이 골방 같이 구석에 있으면 외부인들이 어떻게 찾아가겠느냐"고 설명했다. 방 목사는 인근 회사에 다니는 신앙인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기도하고 가는 경우가 늘었다고 귀띔했다.
수유리교회에는 당회실 같이 고정된 방이 없고 그저 여러 회의실만 있다. 방마다 '남선교회'니 '청년부'니 하는 고정된 문패가 없으니, 그때마다 필요에 따라 교회 안팎, 남녀노소 누구나 다양한 모임을 열 수 있다. 교회라는 느낌을 풍기는 색상이나 상징물은 피했다. 일부러 교회와 상관없는 인테리어 업체를 선정할 정도였다. 모두 교회 밖 사람들이 와도 거부감이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허 목사는 건축의 최대 목적은 "교회를 이웃에게 그대로 열어 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공간과 장비가 충분하지 않은 지역 시민단체들에게 교회 공간을 내주는 것은 그저 장소를 빌려주는 차원을 넘어 교회가 지역 문화를 생성하는 '샘' 역할을 담당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수유리교회가 첨단 장비를 갖추고 이웃들에게 넉넉하게 빌려주자 주변에서 입소문을 타고 금세 퍼졌다. 2005년 가을 문을 연 뒤 작년 3월까지 2000여 명이 다녀갔다. 지금은 구청 내 어린이집이 구민회관을 두고 수유리교회에서 행사를 치를 정도다. 교통이 좋고 무엇보다 필요한 장비가 잘 갖춰졌기 때문이다.
"힘 없는 이들 문전박대? 그게 교회고 목사냐"
억대에 이르는 고가 장비를 갖춘 이유에 대해, 허 목사는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교회만 사용하는 거면 이렇게 비싼 것은 필요 없다, 그렇지만 전문가들이 찾아와도 불편 없이 사용하도록 하고 싶었다, 모든 이가 쓰는 공간인데 부족하지 않길 바랐다"고 말했다.
지하 2층 카페 '제리코'의 경우 처음엔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 교인들의 반대도 많았지만, 지금은 이용객들이 문 여는 시간을 늘려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반응이 좋다. 제리코에도 작은 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와 음향 시설을 갖춰놓아, 시민단체들이 각종 모임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단체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소식이다. '한살림'과 '녹색 삶을 위한 여성들의 모임' 등이 이곳에서 행사를 치렀고, 지역 장애인 단체가 자선 음악회를 개최했다. 초기부터 매주 이틀은 수화 교실이 열린다.
방 목사는 "한 장애인 단체가 우리 교회보다 훨씬 큰 교회의 문을 먼저 두드렸지만 방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우리를 찾아왔다"며 "돈도 힘도 없는 사람들이 사용하겠다는데 자리 내주고 그들이 모일 때 커피와 과자라도 사와야 교회다운 거지 어떻게 문전박대하느냐, 그게 어떻게 교회고 목사냐"고 분개했다.
장소 대여 넘어 문화 행사 구상 중
지금은 교회 자체 프로그램보다는 지역 여러 단체들이 기획한 행사들이 주를 이루지만, 두 목회자는 교회가 더 적극적으로 프로그램을 개발할 생각을 하고 있다. 본당에서 예술 영화를 상영해볼 생각이다. 대학로와 지하철로 12분 거리임을 감안, 지하 1층을 연극 연습장으로 빌려주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지역 어린이들이 쉬고 공부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할 생각이다.
그렇게 마구 빌려주다 보면 잃어버리거나 망가지는 것을 걱정해야 하지는 않을까. 허 목사는 "처음엔 컴퓨터 본체를 들고 간 일도 있었다, 왕래가 드물 때는 털리지만 북적거리면 오히려 도둑이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그는 "요즘 기계를 잘 만들어서 웬만해서는 고장 나지 않으며 많이 쓴다고 수명이 단축되지도 않는다"며 "어차피 때 지나면 구식이 되는데, 많이 써서 고장 났다면 잘 쓴 거 아니냐"고 말했다.
방 목사는 "교인들이 우리의 뜻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이해할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목회 계획을 마련하고 하나하나 이뤄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면 알게 된다"고 전했다. 이어 "요즘에는 협조하는 교인도 많아졌고, 자기가 직접 나서지는 않지만 교회를 자랑스러워한다"고 말했다.
허 목사도 "교회가 이웃을 초대하려면 얼마나 많은 정성과 돈이 드는가, 그렇게 해서 총동원주일 행사를 치러도 결국 이웃교회 교인들 빌려오는 수준을 못 벗어난다"고 지적하고 "그렇지만 벌써 수천, 수만 명이 우리 교회를 다녀갔고 지금도 오고 가는데, 우리 교회에 등록하는 게 능사가 아니며 그들이 교회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지고 가는 것만으로 감사한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독교 대안언론 <뉴스앤조이>(www.newsnjoy.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