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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내마을에서 장을 보려면, 근처에 가게가 없으므로 5일만에 서는 장을 찾아가야 한다. 이곳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북 경주시 양남면에 속하지만 가깝기는 입실(외동읍)이 더 가깝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은 어느 곳이든 가도 되는데, 입실에선 3일·8일이 장날이고, 양남에선 4일·9일에 장이 선다.
그런데 마을 어른들을 가만 보니까 가깝고 더 크고 하루종일 서는 입실장보다 멀고 오전에만 잠깐 서는 양남장을 더 이용한다.
@BRI@왜 그러냐고 여쭤봤더니 "늘 그랬으니까"와 "양남에 사니까 양남장을 이용한다", "간 김에 양남농협과 면사무소를 이용할 수 있으니까"라는 답이 왔다.
두 시장을 몇 번 다녀보니까 한 가지 차이점이 눈에 띄었다. 입실장은 전문장사치들이 좀 많은 데 비하여, 양남장은 직접 밭에서 재배한 남새를 내다 놓는 시골할머니들도 많이 보인다는 것.
우리 부부는 특별히 어느 곳을 선호하기보다 짬이 날 때 장날과 일치하면 그곳에 간다. 오늘 특별히 살 건 없었으나 가을 이후로 하도 장에 가본 지 오래돼 한 번 들러 보고 싶었다.
장을 소재로 한 수많은 시와 소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장은 사람들의 살아 있는 모습을 가장 여실히 살펴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여야 했다.
그러나 장은 장이 아니었다. 봄 여름 가을보다 갖다놓은 게 아무리 적다 해도 장사치에 비해 손님이 너무 적었다.
겨울이라는 추운 날씨 때문에 그러는가 싶어 엿 파는 할머니께 여쭈었더니, "오데예, 마 우찌 된 일인지 통 손님이 없어예" 하셨다.
이어지는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해가 갈수록 손님이 없다는 거였다. 몇 년 전에는 아무리 추워도 지나가려면 사람과 사람끼리 부딪히는 게 예사였는데, 재작년부터는 손님이 뚝 끊어졌다는 거였다.
정말 사진 찍기 수월하도록 해주려는 배려(?)인지 손님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이왕 온 김에 뭐라도 사 가려고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생선과 해초류를 파는 가게 앞을 지나치는데, 언뜻 모자반으로 보이는 게 눈에 띄어 저녁에 한 번 무쳐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할머니께 여쭈었다.
"이 모자반 어떻게 파세요?"
"이간 모자반이 아니고 진저리라 안 하능교."
'진저리'라고 하기에 하도 이름이 희한하여 한 번 더 확인하고는 왜 이름이 진저리냐고 다시 여쭈었다.
"아, 이 추운 저실(겨울)에 바닷속에 들어가 딸라몬 올매나 춥것소? 진저리가 안 나것소?"
하도 재미있는 해석에 할머니께 사진 한 장 찍어도 되겠느냐 하자, "말라꼬 쭈구렁탱이 할망구 사진을 찍을라능교?"하면서도 포즈를 잡아주었다.
시장 분위기를 그나마 맛본 건, 옷가게 앞을 지나치려 할 때 내 앞에 가던 할아버지와 맞은 편에서 오던 할아버지 두 분을 만나면서였다. 이미 막걸리 몇 잔을 걸쳤는지 불콰한 낯빛의 두 분은 아주 오랜만에 만난 사이인 듯 누구라 할 것 없이 말하는 것이었다.
"야 이 문디야, 아즉 안 죽고 살아 있은갑네."
"이 쌔가 만 발이 빠져 디질 놈아, 니 두고 와 내가 몬저 죽을 끼고."
"조게 조디가 팔팔한 거 본께네 아즉 한 이십 년은 더 살 것다."
"그래 내사 배라빡에 똥칠할 때까정 살 끼다."
말투만 들으면 두 사람은 철천지원수 같으나 실상은 더 없이 다정한 친구 사이인데, 반어적으로 욕으로 우정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 분위기도 잠시 시골장의 한적함이 자꾸 눈에 걸렸다.
여기도 제법 큰 유통회사가 시장 바로 앞에 들어와 있으니 사람들은 재래시장보다 거길 더 이용하는 것 같다. 매스컴 등에서 재래시장을 살리자는 프로그램을 본 적 있지만 정말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달리 팔 기회가 없는 시골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거친 손을 헤쳐 일궈 거둔 농산물이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사장돼 버릴 수밖에 없다면 정말 큰일이다.
삶의 향기가 느껴지는 시골장이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는 특히 도시인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사는 곳 주변의 5일장 날을 꿰고 있어 휴일에 드라이브도 할 겸 시장 보러 온다면 얼마나 좋으랴.
장은 오늘도 살아 있고, 내일도 살아 있어야 하기에.
덧붙이는 글 | 양남장을 보려면 경주시 양남면을 찾아 유일하게 신호등이 있는 네거리에서 바다 쪽으로 들어오면 됩니다. 그리고 장날은 4일, 9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