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고기가 놀아야 섬은 풍요롭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칠산바다의 중심에 자리한 송이도 큰말, 작은말, 외미, 양골 등엔 160여 가구, 1000여 명이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60여 가구에 130여 명이 살고 있을 뿐이다. 낙월면의 유인도는 송이도 외에 안마도, 상하낙월도, 대각이도, 대석만도, 안마도 등이다. 횡도와 죽도, 대각시도와 소석만도 등은 몇 년 전까지 한두 가구가 섬을 지키고 있었다.
송이도와 낙월도 그리고 안마도는 모두 낙월면에 속한다. 하지만 선외기나 사선으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낙월도와 송이도를 연결하는 뱃길은 없다. 송이도에서 낙월도나 안마도를 가기 위해서는 객선을 타고 향하도로 나와 버스를 타고 염산과 영광읍을 거쳐 법성으로 가서 계마항에서 송이도와 낙월도를 가는 배를 타야 한다.
배시간도 물때에 따라 변화가 있기 때문에 하루를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탓에 낙월도 주민들의 생활권은 염산면에 속하며, 송이도와 안마도 주민들은 법성포를 이용한다. 그래서일까. 염산은 젓갈시장이 형성되고 법성포는 조기가 특산품이다. 낙월도 인근에서 잡은 새우젓과 송이도·칠산도 인근에서 잡은 조기가 염산과 법성 두 포구의 특징을 결정지은 것이다.
사실 이러한 차이는 해양생태의 특징이 만들어낸 오묘한 균형성에 기반하고 있다. 두 섬의 주민들의 이야기는 이렇다. '낙월도 인근 어장은 물살이 급해 조기잡이 보다는 조류를 이용한 새우잡이 등이 적합했다. 그런 탓인지 조기가 칠산바다를 떠난 뒤 낙월도는 멍텅구리배라 부르는 새우잡이가 최근까지 활발했지만 송이도는 1960년대 조기잡이 이후에는 어업보다는 농업에 의존해 약초, 마늘 등 대부분의 밭농사와 일부 논농사로 생활하고 있다.'
하늘이 내리신 생선, 조기
바다 고기는 철따라 맛이 다르다. 인간의 입맛과 자연의 오묘한 조화에 새삼 혀를 내두른다. 인간이 사철 숭어를 찾고 주꾸미만 찾는다면 어떻게 될까. 시도 때도 없이 낙지만 먹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겨울에는 숭어가 맛이 있고, 봄에는 주꾸미가 맛이 있고, 4월에는 농어가 맛이 좋고, 여름에는 민어가 맛이 좋고, 가을에는 낙지가 제격이다.
그런데 예외 없는 법칙 없다든가. 머리에 돌을 이고 살아 '석수어'라 부르는 조기란 놈은 사철 맛이 좋다. 그래서 하늘이 내리신 고기요, 임금님에게 진상했던 고기다. 조기가 많이 잡히던 40여 년 전에 송이도에서 본 칠산바다는 도시의 야경이 무색할 정도로 불야성을 이루었다고 한다. 곡우사리를 전후해 스무날에서 스무닷새까지 바다에 불빛은 꺼지질 않았다. 인간의 욕심이 빗어낸 결과일까. 지금은 칠산바다에서 조기를 찾기가 쉽지 않다. 조기 이야기만 나오면 송이도 노인들은 아직도 흥을 낸다.
조기잡이는 일곱물과 여덟물 사리에 맞춰야 한다. 송이도 조기잡이 배는 한 척에 대여섯 명의 선원들이 탄다. 외지의 중선배처럼 규모가 크지 않다. 송이도에서 잡는 조기잡이 그물은 주목망으로 조기가 이동하는 길을 알지 못하면 어렵다. 작은 배로도 외지의 큰 배 못지않게 조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물길을 훤하게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이도에 조기가 들어 올 때는 맑은 하늘이 뇌성벽력을 치며 뒤집어진다. 곡우사리를 앞두고 하늘이 소동을 치면 바다색깔이 황금색으로 변한다. 조기가 들기를 기다리며 배에 타고 있던 예닐곱 명의 어부들의 손길이 바빠졌다.
고참 어부들는 긴 대나무를 바다 속에 집어넣고 작은 소리라도 들으려는 듯 귀에 바짝 당겨대고 손을 모았다. "고개를 돌렸네 그물내려." 소리와 함께 그물이 바다 속으로 자맥질을 한다. 가는 대나무 구멍 속으로 들려오는 조기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조기머리가 어느 방향으로 숙였는지 알아차리고 그물자리를 가늠할 줄 알아야 뱃사람이 존경받는 '일류사공'이었다.
당시 그물 끝 '불뚝'은 잡힌 조기로 가득해 배에 옮겨 담는 바지질이 힘겨웠을 정도다. 부서만한 큼직한 암놈이 먼저 걸려들었다. "아이구 용왕님 조상님 고맙습니다." 그물에서 떼어낸 큼직한 암놈을 송이도에서는 '양풀'이라 한다. 이놈은 맘대로 먹을 수 있는 조기가 아니다. 먼저 조상님께 올리고 배 선왕님에게도 올려야 한다. 조기도 많이 잡고, 사고 없이 해달라고 치성을 드리는 것이다.
영광과 고창 그리고 부안의 마을 중에는 잡은 조기를 먼저 조상님에게 올리는 '조기심리'라는 것을 한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기가 나갈 때도 천둥번개가 친다. 어부들은 천둥소리를 들으며 '조기가 칠산바다를 빠져 나가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기는 하늘이 주고 하늘이 거두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광경찰서장 할래, 낙월지서 주임할래
칠산에서 조기가 많이 잡힐 때면 송이도 몽돌해수욕장에 줄지어 술집이 지어졌다. 송이도 주민들에 따르면, 다른 파시처럼 작부들이 술을 팔고 호객을 하는 흥청거림은 없었다고 한다. 만선한 배들은 법성포 조기를 팔고 인근 법성리와 목맥리에서 회포를 풀면 어구를 손질했다. 조기잡이를 하는 모든 배들이 만선을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만족할 만큼 조기잡이를 하지 못한 선주들은 칠산과 가장 가까운 송이도에서 목을 축이고 물때를 기다렸을 것이다. 동력선이 일반화되지 않던 시절에 송이도는 조기잡이 어업전초기지였다.
조기잡이는 송이도, 새우잡이는 낙월도, 꽃게잡이는 안마도 등 칠산바다가 돈이던 시절 개들도 천원짜리를 물고 다녔다. 이 시절에는 '영광경찰서장보다, 낙월지서주임'이 낫다는 이야기도 회자되곤 했다. 이제 칠산바다를 황금색으로 물들였던 조기는 사라져 노 젓는 소리, 그물당기는 소리, 바지질 소리 등은 더 이상 듣기 어렵다.
조기잡이 배들의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기워하던 당맞이굿은 1980년대 말에 멈추었다. 칠산바다를 찾던 조기들이 사라지고 20여 년 동안 근근이 이어오던 것이 당맞이굿이었다. 정월 초하루가 되면 당산제를 지내고 이튿날은 당맞이굿을 했다.
깨끗하고 생기가 좋은 사람을 제주로 선정하고 제를 준비한다. 선정된 제주는 제관이 되고, 선주들은 섣달그믐 무렵 자기배의 오색기를 큰당 주변에 꽂아둔다. 당샘에서 음식을 준비한 제관은 혼자서 초하루 저녁 10시 무렵 큰당의 칠성단에 수소머리와 제물을 모시고 마을의 평안과, 풍어와 만선, 풍년, 우부들의 무사귀환 등을 기원한다.
이튿날 큰당에서는 남자들만 참여하는 당맞이 굿이 농악과 함께 시작되며 선주들은 당맞이 굿이 끝나면 큰당으로 달려가 오색기를 가지고 내려와 자기배에 꽂는다. 제일 먼저 오색기를 가져와 배에 꽂는 사람은 그해 만선을 한다는 이야기가 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맞이 굿이 끝나면 농악대는 마을샘을 돌며 샘굿을 쳐, 일 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고 부정한 일이 없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이때도 마을여자들과 부정한 남자들은 참여하지 못한다. 송이도 당집에는 일곱 개의 철마가 모셔졌다고 전한다. 해방 후 모두 잃어버리고 한 개만 남았는데, 면서기가 몰래 가지고 나가려다 선창에서 벼락을 맞아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 탓일까, 1990년대 초반 송이도에 '핵폭퐁'이 몰아쳤다. 당시 주민 한 사람(1987년 외지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알려짐)이 핵폐기물처리장 유치신청을 했기 때문이다. 섬 주민들과 상의 없이 이루어진 일로 작은 섬이 발칵 뒤집혔고, 송이도는 물론 영광주민들의 결사반대투쟁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1990년대에는 일부 주민들이 김양식을 비롯해 양식어장에 관심을 갖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최근 송이도 주민들은 꽃게잡이를 비롯해 고기잡이를 하지만 시원치 않아, 고추 등 밭농사와 일부 쌀농사를 하며 생업을 이어가고 있다.
송이도에는 전국최대규모의 왕소사나무군락, 몽돌해수욕장 등 볼만한 것들이 많다. 인근 작은 섬 칠산도에는 세계적인 희귀조 노랑부리백로(천연기념물 361호)와 수달이 서식한다. 여름철에는 해수욕장을 찾는 사람에게 방을 내주고 식사를 준비하는 민박을 하고 있다. 몽돌해수욕장을 지나 마을 뒤로 돌면 물때에 따라 각시도까지 펼쳐지는 십여 리의 갯벌을 볼 수 있다. 여름철을 제하고 찾는 이가 없는 송이도, 호젓하게 섬여행을 원하는 연인들에게 권하고 싶은 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