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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교육연수원에서 '영어교육 워크숍' 중인 전남지역 영어교사들. 지난 1월 31일부터 2월 2일까지 3일 동안 주한미대사관 주관으로 진행되었다.
전남교육연수원에서 '영어교육 워크숍' 중인 전남지역 영어교사들. 지난 1월 31일부터 2월 2일까지 3일 동안 주한미대사관 주관으로 진행되었다. ⓒ 안준철
전 선생님!

연수를 다녀온 인사도 드릴 겸 학교에 들렀습니다. 집과 학교가 걸어서 십 분 거리다 보니 방학이라 딱히 할 일이 없어도 학교에 자주 오는 편입니다. 도서관 업무를 맡았던 지지난해까지는 더욱 그러했지요.

오전 내내 한두 명의 아이들이 다녀갈 뿐이지만 두세 권의 책을 골라 손에 들거나 가슴에 안고 도서관을 나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기 좋아 저절로 발길이 학교로 향하곤 했지요.

@BRI@방학은 우리 교사들에게도 책을 읽을 좋은 기회이지요. 요즘은 일주일에 두세 권가량 책을 읽고 있는데 책을 가까이하면 할수록 그동안 저 자신이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여실히 깨닫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방학이 가기 전에 한 권의 책이라도 더 읽고 싶어 안달하던 참인데, 영어교육 워크숍을 마치고 돌아온 어제(2일) 밤에는 모든 것을 다 접고 영어 공부에만 전념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책이 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웃자고 하는 말이겠지만, 거리에서 외국인을 만나면 슬슬 꽁무니를 빼는 사람이 다름 아닌 영어 선생이라지요. 하긴 그럴 법도 한 일입니다. 한국 사람이 외국어인 영어를 못한다고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지만,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영어 교사들이야 사정이 다를 수밖에요. 물론 전 선생님처럼 영어 교사로서의 전문성과 열정까지 겸비한 훌륭한 선생님들이야 해당하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도 한때는 아파트 단지에서 자주 만나는 외국인들이 부담스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영어를 잘하든 못하든 외국인을 만나면 수업료 없는 공짜(?) 공부를 하는 재미로 일부러 다가가 수작을 부리는 일이 더 많아졌지만 말입니다.

언젠가는 혼자 지리산을 오르다가 외국인 부부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무려 일곱 시간이나 함께 산행을 하면서 영어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큰 횡재를 한 기분이었지요.

작년에는 광주에서 아시아권 작가들과의 만남이 있었는데 뒤풀이 자리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온 시인과 영어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툰 토막영어로 간신히 대화의 맥을 파악하기에도 급급한 저와는 달리 그의 영어는 꽤 유창했습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외국인이어서 그러려니 하다가 그들이 필리핀이나 인도가 아닌 팔레스타인에서 온 작가라는 사실이 저로 하여금 궁금증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게 된 것은 팔레스타인이 필리핀이나 인도처럼 영어를 상용하는 나라가 되었든지, 국제적인 의사소통 능력을 갖추기 위해 개인적으로 많은 투자를 했든지, 아니면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했든지, 이런 이유들 때문일 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학교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정도 영어는 할 줄 압니다."

그 말에 제가 조금 놀라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그는 제가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겠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자기 나라는 한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입시가 아닌 실제적인 의사소통 능력 향상에 초점을 맞추어 영어 공부를 하고 있노라고 마치 정답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두 가지 생각(혹은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하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해결될 기미가 보이기는커녕 더욱 심화 되고 있는 입시위주 교육의 심각성에 대한 재확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영어 교사로서의 수치심이었습니다.

그동안 입시교육의 맹점을 지적하고 질타하면서도 그 문제해결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노력은 게을리했다고 하는 반성과 함께 저 자신이 아직 어떤 변화에 적응할만한 준비된 교사가 아니라는 자각이 일기도 했습니다.

왼쪽부터-Aelee Kwon(주한미대사관 공보과 보좌관, 강사), 전득용 선생님(여수공고 영어교사), Jean Vander Woude(주한미대사관 공보과 지역총괄담당관, 강사)
왼쪽부터-Aelee Kwon(주한미대사관 공보과 보좌관, 강사), 전득용 선생님(여수공고 영어교사), Jean Vander Woude(주한미대사관 공보과 지역총괄담당관, 강사) ⓒ 안준철
사흘 동안의 짧은 연수였지만 이번 주한미대사관에서 주관한 영어교육 워크숍 신청을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곳에서 전 선생님을 만난 것도 저에게는 큰 행운이었고요. 영어 기초가 부족한 실업계 아이들을 상대로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저도 출석을 부를 때마다 서로 눈을 맞추고 영어로 안부를 주고받기도 하지만 그 외에는 가끔 교실 영어를 사용하는 정도에서 그칠 때가 많았거든요. 그것을 실업계에서 근무하는 탓으로만 돌렸으니 제 잘못이 크지요.

기억납니다. 종이비행기 만드는 법을 영어로 말하는 시간이었지요. 먼저, 종이를 반으로 접고, 그것을 다시 펴서, 그 다음에는 왼쪽 윗부분을 접어 중앙선에 오도록 해야 하는데 그것을 영어로 말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지요. 곁눈질로 보니 선생님도 어려워하기는 마찬가지였던 것 같은데, 누군가 자원해서 앞에 나와 직접 해보라는 강사의 말에 선생님은 아직 완성이 덜 된 종이비행기를 들고 앞으로 나갔지요. 그때 선생님이 종이비행기 접기 시연을 하기 전에 했던 말이 지금도 제 귀에 쟁쟁합니다.

"제대로 한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방법이 서툴거나 틀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는 저나 전 선생님이나, 혹은 그날 전남교육연수원 100강의실에 앉아 있던 130여 명의 수강생들이 모두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 미완성의 작품을 들고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열정과 용기를 지닌 사람은 바로 전 선생님이셨지요. 그때 제 코끝이 찡해지면서 잔잔한 감동이 가슴을 헤집고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남교육연수원 김춘현 영양사님 일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운 김춘현 영양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2004년 가을 한 달 동안 JLP 영어교사 직무연수를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달 내내 날이 맑거나 흐리거나 김 영양사님의 환한 미소와 친절한 태도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햇수로 3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녀는 여전히 일하는 것이 너무 즐겁다는 표정이었습니다. 학교에 돌아가면 그런 눈빛으로 아이들을 대하라고 조용히 일러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전남교육연수원 김춘현 영양사님일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운 김춘현 영양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2004년 가을 한 달 동안 JLP 영어교사 직무연수를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달 내내 날이 맑거나 흐리거나 김 영양사님의 환한 미소와 친절한 태도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햇수로 3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녀는 여전히 일하는 것이 너무 즐겁다는 표정이었습니다. 학교에 돌아가면 그런 눈빛으로 아이들을 대하라고 조용히 일러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 안준철
고맙습니다. 그 감동이 학교 현장에서의 교육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애써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저도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을지라도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한 번 해보려고요. 남을 탓하거나 게으름을 피우기보다는 저 자신이 먼저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준비된 교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싶습니다.

남은 방학 잘 보내시고,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 재충전하는 좋은 시간 되시길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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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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