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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의 전문 지식은 가치판단을 잘 해내는 것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다. 사진은 MBC 의학드라마 <하얀 거탑>의 한 장면.
ⓒ MBC 제공
우리는 의사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의사는 환자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고 가르쳐 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생각은 상당수의 의료 상황에서는 크게 틀리지 않는다.

의료의 궁극적 목적은 환자의 최선의 이익이다.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첫째는 '환자에게 가능한 최선의 상태가 무엇인가'이고 둘째는 '어떻게 해야 그 상태에 잘 도달할 수 있는가'이다. 이 중 첫째 물음에 대한 답은 누구에게나 자명한 경우가 많다. 큰 상처를 입은 아이에게 최선은 당연히 그 상처가 아무는 것이고 급성 폐렴에 걸린 건강한 사람에게는 그 폐렴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둘째 물음에 대해서는 의료 전문가인 의사만이 잘 답할 수 있다. 이렇게 환자의 최선의 이익 추구에 필요한 답을 의사가 모두 알고 있는 경우 환자는 의사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 가장 좋다. 의사를 '선생님'으로 간주해도 되는 것이다.

말기 암 환자에 있어 의사의 역할

그런데 의사 말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더는 환자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말기 암 환자의 경우이다.

@BRI@"직장암 말기 환자 김미선씨는 수술 후 세 차례, 재발 뒤 열 차례 항암제를 투여받았다. 너무 아파 숨이 멎을 만큼 극심한 고통이었다. 특히 재발 뒤 1년 넘게 이어진 항암제 투여는 김씨의 육체뿐 아니라 정신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열 번째 항암제를 맞은 다음이었어요. 의사가 부르더니 약에 내성이 생겨 다른 걸로 바꿔야 하는데 이젠 더 쓸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약 투여 방법을 달리 해보겠다는 거예요. 저와 가족들은 너무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걸, 치료에 대한 희망도 없이 열 번 맞고 나면 그만일 것을 그렇게도 권했단 말인가. 의사로서는 달리 취할 방법이 없어서였겠지만 저는 너무 억울하고 속이 상했습니다. 병원이 하자는 대로 그냥 끌려간 제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고요."
(<신동아> 2001년 6월호 "한국에서 암환자가 된다는 것" 중에서)


이 환자에게는 재발 이후 고통스런 항암치료의 길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항암치료 대신 대체의학에 의존해 볼 수도 있었다. 또는 더 이상의 적극적인 치료를 포기하고 통증, 구토, 변비 등의 부정적 증상만을 없애는 호스피스 치료를 택할 수도 있었다.

이 중 환자의 생명을 연장시킬 확률이 가장 큰 것은 아마 항암치료일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생명연장 효과는 수주에서 수개월에 머물 때가 많으며 이 기간 환자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

이에 대해 대체의학은 성공 가능성은 떨어질지 모르나 환자를 덜 고통스럽게 하면서 생명연장을 시도한다. 그리고 호스피스 치료는 생명 연장 시도를 더는 하지 않되 환자가 삶의 마지막 기간을 평온하게 누리면서 자기의 일생을 정리할 기회를 준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이 환자의 최선의 이익에 부합하는지는 자명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고통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결국 패배할지라도 죽음과 끝까지 맞서야 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죽음을 만물의 이치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현대 의학의 발달은 이렇게 사람들의 가치판단이 일치하지 않는 상황을 많이 가져왔다. 과거 의료는 '환자를 건강하게 회복시키거나 그렇지 못하여 죽게 놓아두는' 단순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의료는 '회복은 못 시키나 고통스러운 연명은 가능'하거나 '무의식 상태의 연명만은 가능'한 회색지대를 많이 발생시켰다. 이런 회색지대에서 무엇이 최선인지에 대한 사람들의 가치판단은 흔히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말기 암 환자의 경우도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 누구의 가치판단이 옳은가. 만약 의사의 가치판단이 가장 옳다면 의사에게 모든 결정을 맡길 때 환자의 최선의 이득이 보장될 수 있다. 하지만 의사의 가치판단이 환자나 가족 등 다른 사람의 가치판단보다 올바를 것이라고 생각할 근거는 찾기 힘들다.

가치판단은 의사만의 몫은 아니다

가치판단에 뛰어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생명, 인간, 선과 악 등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깊은 숙고와 통찰을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의대 교육과 의사수련 과정이 다른 직종의 교육과 비교해 특별히 이런 숙고와 통찰의 기회를 더 많이 부여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물론 의사들은 거의 일상적으로 질병, 고통, 죽음과 대면한다는 점에서 인생의 근본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계기를 더 많이 갖고 있다. 하지만 우리 의료 환경과 문화에서 의사들이 이런 계기들을 실제 성찰의 기회로 삼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의사들은 의학적 전문지식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이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전문 지식은 가치판단을 잘 해내는 것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다. '사실'과 '가치'는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의사의 전문지식은 가치있는 상태가 무엇이라고 정해졌을 때 그 상태에 잘 이를 수 있는 방법을 찾는데 유용하다. 즉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있어 해결해야 할 두 가지 물음들 중 두 번째 물음 해결과만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기 암 환자에 있어 '무엇이 환자에게 최선의 상태인가'라는 첫 번째 물음에 답하는데 의사는 특별히 나은 위치에 있지 않다. 그렇다고 이 판단을 객관적으로 잘 해낼 다른 전문가 집단이 따로 존재하는가도 의문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진정한 가치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인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설혹 가치가 객관적인 것이라 해도 누구의 가치판단이 옳은지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지금으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가치판단이 일치하지 않고 그 중 어떤 것이 객관적으로 옳은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럼 누구의 판단을 따라야 할 것인가. 바로 자신의 가치관에 입각한 환자의 가치판단이다. 왜냐하면 그 판단이 영향을 미치는 생명도 죽음도 고통도 환자의 것이고 환자가 감수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사는 말기 암 환자를 대하면서 무엇이 환자에게 최선인지까지도 선택해 주는 '선생님'이 되려 해서는 안된다. 선생님이 되려 하면 의사는 자신의 주관적 가치관을 환자에게 강요하게 되어 오히려 환자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

대신 의사는 환자가 본인의 가치관에 비추어서 최선의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충분히 정보를 제공하는데 그쳐야 한다. 그리고 환자의 선택이 끝난 다음에는 이것이 잘 실현되도록 돕는 '동료'나 '협조자'가 되어야 한다.

환자 역시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라는 태도로 나올 때 그대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환자를 보는 의사가 환자 한명 한명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환자의 가치관, 그가 살아온 인생과 놓인 전체적 상황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또 깊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바로 환자 자신이다.

택시를 탈 때에도 우리는 '기사 아저씨 알아서 가고 싶은 대로 가 주세요'라고 맡기지 않는다. 자기의 하나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고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말기 암#환자#의사#항암치료#대체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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