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명동 거리에 돼지 한 마리와 흑염소 여섯 마리가 뛰어다녔다. 롯데백화점 맞은편 도로에는 무가 농민들의 손에 의해 버려졌다.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 농축수산비상대책위원회(이하 농축수산비대위) 소속 농민 20여명은 12일 오후 을지로 입구에서 한미FTA(자유무역협정) 7차 협상 중단을 촉구하며 돼지와 염소 등 가축과 직접 기른 농산물을 갖고 거리 선전전을 펼쳤다.
이들은 오후 2시 20분께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라고 적힌 팻말을 몸에 단 돼지와 염소 등을 목줄로 묶어 명동 거리를 누비며 한미FTA 협상 저지를 주장했다. 이어 농민들은 가축들을 가로수에 묶은 다음 '한미FTA 체결되면 농민 살 길 없다'고 적힌 대형 현수막을 펼쳐 들었다.
작업복 차림에 얼굴에 복면을 한 한 농민은 "먹을거리에 대한 안정성이 검증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무분별하게 외국산 먹을거리를 들여올 수 있겠느냐"며 광우병 우려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수입산 쇠고기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이들의 거리 선전전은 집회 신고가 되지 않은 '불법' 집회로 분류돼 거리 선전전은 20여분만에 경찰의 진압으로 끝마쳤다. 경찰은 농민 한 명을 연행하고, '불법 시위용품'인 돼지와 염소 등을 명동 파출소로 압수한 뒤 남대문 경찰서로 이송했다.
한편 또다른 농민들은 무 등 농산물 2톤 가량을 들고 나와 롯데백화점 맞은편 대로에 뿌렸다. 이들은 "FTA협상은 이미 우리 농산물을 천시하고 있다"며 농산물을 폐기하게 된 배경을 밝혔다.
버려진 농산물은 즉각 청소차가 출동, 수거해 간 덕분에 큰 교통 혼잡은 없었다.
농축수산비대위는 "이번 선전전은 한미FTA 협상이 일방적 퍼주기 협상으로, 타결되면 농업은 물론 농민들도 길거리로 내몰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며 "서울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진행된 이번 퍼포먼스를 통해 서울 시민들에게 한미FTA 협상에 반대하는 국민적 의사를 모으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이같은 '깜짝' 시위에 대해 명동의 많은 시민들은 상반된 견해를 보였다. 일부에서는 "농민들과 가축들이 불쌍하다"고 반응했지만, 반면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반대 의견도 있었다.
전우태(21·남)씨는 "오죽하면 이렇게 가축들을 데리고 와서 시위를 하겠느냐"며 "농민들이 이렇게 반대하는데, 왜 정부는 굳이 한미FTA를 체결하려고 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반면 조동익(19·남)씨는 "가축들이 무슨 고생이냐, 이런 식으로 시위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고 농민들의 태도를 꼬집었다.
삼보일배도 불발... "한미FTA에 관한 진실을 알아달라"
한편 경찰이 한미FTA 협상에 반대하는 집회에 대해 금지 통보를 내린 가운데 이날 오후 2시 종로 종묘공원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굴욕적인 한미FTA 저지 결의대회'는 기자회견 형식으로 축소됐다.
주최측인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이하 범국본)는 애초 종묘공원에서부터 광화문 열린시민공원까지 삼보일배를 예정했으나 이 또한 경찰의 통제로 할 수 없었다.
오종렬 범국본 공동대표는 "한미FTA를 민주적 공론화 과정이 아닌 정부 관계자, 자본가, 사대주의자들만의 논의로 추진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며 "한미FTA 체결 여부가 국가의 명운을 결정하는 만큼 밀실에서 논의돼서는 안 된다"고 촉구했다.
오 공동대표는 "한미FTA가 체결되면 한국인들이 미국인들처럼 대접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잘못된 것"이라며 "경제합방, 문화합방으로 우리는 노예가 되고, 서민들의 생계는 위협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경찰의 집회 통제에 대해 "경찰들도 이 땅의 빈민이고, 이 땅은 당신들의 나라"라며 "당신들의 후손들도 이 땅에 살게 될 것인데, 한미FTA에 관한 진실과 사실을 보아달라"고 호소했다.
한편 이날 집회 참가자 400여명은 종묘공원에서의 집회가 여의치 않아 오후 4시 40분께 1차 해산을 한 뒤 종각에서 재결집했다. 하지만 애초 계획대로 광화문까지 삼보일배는 할 수 없어 오후 5시 30분께 2차 해산을 한 뒤 3시간 뒤에 명동성당에서 마무리집회를 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