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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명절이라 가족이 다 모인 날 풍경. 몇 달 만에 보는 걸 텐데 오빠네 막내인 '중딩'녀석은 종일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아 있고 남동생네 초딩 둘 중 한명은 만화책를 끼고 소파에 박혀있고 또 한명은 게임기에 코를 박고 있다. 보고 있자니 참 갑갑하고 안됐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건 논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소싯적 우리에게 '논다'는 건 누구랑 함께여야만 할 수 있는 것이었다(만화방에 가거나 쪽자를 하거나 학교운동장에서 놀이기구를 탈 때도 항상 여럿이 어울렸다). 특히 우리동네 애들은 일단 놀기로 작정하면 집집마다 돌며 친구이름을 불러댔다.

놀이의 꽃 '다방구'를 할 때는 마을아이들 절반이 참여해 동네 골목을 접수했고, 고무줄뛰기도 제대로 할라치면 한편에 최소 10명쯤 확보되어야 했다. 그보다 인원이 적으면 공터나 골목에서 밀려나 마당 있는 집으로 알아서 들어가 주는 게 상식이고 도리였다.

마당에서도 네댓 명으로도 할 수 있는 오자미며 공기받기 같은 정적인 놀이가 주를 이루었다. 음식찌꺼기로 배를 채운 커다란 개가 앞발에 머리통을 묻은 채 졸다 한번씩 '컹' 소리를 내기도 하는 '마당'은 동네 골목과 함께 내 어린 시절 놀이문화의 현장이었다.

ⓒ 청년사
책 <땅따먹기>는 바로 이런 마당의 정서를 건드린 동화다. 제목에 낚여 책을 집어든 건데 땅따먹기 놀이를 다뤘을 거란 짐작과는 달리 도덕적 당위를 설파하는 내용이었다.

누렁이 아저씨가 지키고 있는 미영이네 집 마당에 꼬꼬가 등장하면서 동화는 시작된다. 꼬꼬는 수다쟁이 참새 짹짹이와 친구가 되고, 이어 채식주의 고양이인 모질이하고도 친구가 된다.

생태고리상 천적이라 할 이들이 마당을 본거지로 삼아 흐뭇하게 친해져가는 동안 동네 전체가 재개발 바람에 휩싸이고 꼬꼬는 시골집으로 가게 된다. 짹짹이랑 모질이와 함께 시골집 마당에 새 삶의 터를 잡으려던 꼬꼬는 대장 쥐 서생원과 부딪치는데... 다같이 살기위해서는 마당을 '니 땅 내 땅'이 아닌 '우리 땅'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걸 깨닫고 화합한다.

인물 간에 주고받는 대사라든가 꼬꼬와 모질이 등 캐릭터가 나름 신선하다. 도시변두리의 마당 있는 집과 시골집 너른 마당을 축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 또한 지루하지 않아서 동화 자체는 꽤 재미있다.

재미있는데, 그런데 찜찜하다. 닭과 참새와 고양이와 쥐처럼 언어와 신체와 배경이 다른 종자(이른바 다양한 계층의 비유일 텐데)가 모여 사는 땅이 '따먹는' 대상이 아니라 공존의 터라는 인식에 도달하면서 평화협정이 이루어지는 결말이 걸리는 것이다.

작가입장에서는 이건 어디까지나 동화니까, 그리고 한 가족의 사적 공간인 집과 공적 공간인 바깥세상의 경계로 존재하는 마당은 힘세고 드센 아이들 틈에 낄 수 없는 아이들에게 일종의 보호구역 같은 곳이니까, 이 같은 화해가 일종의 판타지로서 가능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가 동화의 룰을 이해하지 못하는 불순한 어른이어서인지 모르지만, 생존조건을 뛰어넘는 화해 메시지는 판타지라기보다는 허무맹랑한 공상에 가까워보인다. 마땅히 일어나는 게 순리이기도 한 자연적 갈등을 일거에 해결하는 가짜화해는 서로 다른 입장끼리의 화합이 그만큼 어렵고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역설로 읽히지 않을까 싶다.

어린시절, 죽고 사는 문제가 걸린 시차기, 오자미, 오징어놀이를 통해 체득한 생존 룰이야말로 인간관계의 기본기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믿는 나는 판타지든 공상이든 무릇 좋은 동화라면 현실의 장을 살아가는 데 탄탄한 에너지원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작가 최진영은 '사람들이 똑똑한 머리보다 따뜻한 마음을 더 가꾸어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땅따먹기

최진영 지음, 김홍모 그림, 청년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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