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곤하게 잠든 딸아이의 얼굴에서 영 시선을 거둘 수가 없다. 천사의 모습이 이렇거니 싶다. 가만히 아이의 두 볼을 만져 본다. 아기 새의 깃털처럼 부드럽다. 새근거리는 고른 숨소리마저도 평화롭기 그지없다. 발그스레한 아이의 두 볼이 잠깐 실룩거린다. 웃는다. 아이의 웃음이 내 가슴에 촉촉하게 스민다.

대체 무슨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있기에 아이는 자면서도 이렇듯 행복하게 웃고 있는 걸까. 깊어도 아주 깊은 밤. 나는 잠 못 이루고 내내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다. 기특해서, 딸아이가 너무 기특해서 보고 또 봐도 자꾸만 보고 싶다.

"여보. 나 내일 귀빠진 날인데, 맛있는 거, 뭐 사줄 거야?"
"생일? 벌써 일년이 지난 거야? 돼지갈비 사준 게 어제인거 같구만."
"뭐야. 그럼 올해도 마누라 생일 잊어 먹고 있었던 거야? 하긴 자기 생일도 언젠지 모르는데 뭐."
"그러니 이렇게 해마다 옆구리 찔러 주잖아."

태권도를 끝내면 떡볶이를 사먹는 딸

점심을 먹고 일터로 나가는 남편을 붙들고 내일이 내 생일이라며 옆구리를 찌르고 있을 때였다. 막 태권도 도장에 가려던 아이가 손을 내밀었다. 돈을 달라는 것이다. 딸아이는 태권도를 하고 나면 꼭 떡볶이를 사 먹는다.

원체 먹성이 좋은 탓에 밥 먹고 돌아서면 금방 또 배가 고프다는 아이다. 그런 아이가 한 시간여 땀 흘려 운동을 했으니 허기가 지는 건 당연한 일. 밖에서의 군것질은 절대 허락하지 않지만 떡볶이만큼은 그래서 눈감아 주고 있다.

그러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딸아이가 떡볶이를 사 먹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는 듯했다. 함께 운동한 언니 오빠들 틈에 섞여 떡볶이를 먹는 재미, 아이는 그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딸아이의 그런 재미를 짐작하고 있는지라 딸아이가 손바닥을 내밀면 아무 말 않고 500원씩 준다.

늦은 오후. 태권도 도장에 다녀온 아이가 뭔가 할말이 있는 듯 내 주위를 뱅뱅 돌았다. 눈치를 살피는 것도 같고 한편으론 뭔가 아주 어려운 부탁이 있는 듯도 싶었다. 뭐 마려운 강아지 같다더니, 딸아이의 모습이 영판 그랬다. 그럴 땐 그저 모르는 체 하는 게 상책이다 싶어 읽고 있는 책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딸아이가 뭔가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

"엄마. 엄마는 생일 선물 비싼 것 받고 싶어요? 싼 것 받고 싶어요?"
"글쎄. 비싸고 싼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선물해 주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겠지."

"그럼, 싼 것도 괜찮아요?"
"그렇지. 선물하는 물건의 가격은 쌀지 몰라도 선물하는 마음은 아주 비쌀 거니까."

▲ 딸아이가 선물한 휴대폰 고리. 이 세상에서 제일 비싼 휴대폰 고리일 것이다.
ⓒ 김정혜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딸아이가 또 내 주위를 뱅뱅 돌았다. 분명 무슨 사연이 있는 듯했다. 순간 야릇한 설렘에 가슴이 뛰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기에 저리 뜸을 들이나 싶었다. 아이를 향한 그 짧은 기다림. 포도 알 같은 까만 눈망울을 굴리며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는 딸아이. 달싹거리는 아이의 입술을 나는 또 이리저리 살피고, 아이와의 그 짧은 신경전에 난 적당한 행복마저 느꼈다. 이윽고 아이의 입이 열렸다.

"엄마. 엄마 생일 미리 축하드려요. 그리고 이거."
"이게 뭐야?"
"불빛이 반짝반짝 거리는 게 마음에 들었는데, 그건 2000원이래요. 그걸 사 드리고 싶었는데."
"어머. 예뻐라. 휴대폰 고리네. 정말 너무 예쁘다. 복희야. 고마워. 정말 고마워."

"엄마. 정말 좋아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2000원짜리는 이거보다 몇 배는 더 예쁜데. 이건 500원짜리예요. 그래서 엄마가 실망하실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아니야. 정말 마음에 들어. 누가 선물해 준건데. 이 세상에서 이 휴대폰 고리가 아마도 제일 예쁠 거야."

"그래도 저는 2000원짜리가 더 예뻤어요. 그래서 꼭 그걸 선물해 드리고 싶었는데, 지금도 2000원짜리만 생각하면 속상해요."
"아니야. 복희야. 정말 마음에 들어. 이 물건의 가격은 500원일지 몰라도 복희 마음은 이 세상에서 제일 값비싼 선물이니까."

"엄마. 정말이죠? 거짓말 아니죠? 정말 실망 안 하는 거죠? 정말 마음에 드는 거죠? 그럼 믿을게요. 그런데 저 뭐 먹을 것 좀 주세요. 배고파 죽겠어요."
"왜? 오늘은 떡볶이 안 사 먹었어?"

"네. 엄마 생일 선물 사느라 못 사 먹었어요."
"그럼 언니 오빠들 떡볶이 먹을 때 넌 뭐 했어?"
"그냥 놀았어요. 언니 오빠들 나올 때까지 뜀뛰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


딸 때문에 감동 먹다

▲ 이 휴대폰으론 매일매일 행복한 소식이 올 것 같다.
ⓒ 김정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요즘 말로 감동을 먹은 것이다. 먹는 것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먹성 좋은 아이인데, 거기다 떡볶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이인데, 거기다 덧붙여 운동하고 나서 언니 오빠들하고 먹는 떡볶이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아이인데.

그런데 엄마 생일 선물을 사려고 그 맛있는 떡볶이를 안 사 먹었단다. 언니 오빠들 다 먹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느라 혼자 뜀뛰기도 하고 달리기도 했단다. 가슴이 불에 닿은 듯 뜨거워졌다.

그런데 불빛이 반짝거리는 2000원짜리 휴대폰 고리가 아무래도 더 좋아 보였는데 그걸 사지 못해 아이는 너무 속상하단다. 그리고 500원짜리 생일 선물을 받고 어쩌면 엄마가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이는 걱정을 많이 했단다. 그래서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엄마 주위를 뱅뱅 돌았단다.

뜨거워진 가슴으로 아이를 힘껏 끌어안았다. 아이의 머리에서 땀 냄새가 텁텁하다. 이렇게 땀을 흘리며 뛰고 구르고 했으니 배는 오죽 고플까. 당장 아이에게 먹을거리를 챙겨 주는 게 먼저이건만, 나는 딸아이를 품에서 풀어놓고 싶지 않았다. 가슴이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으므로.

딸아이는 동전 5개를 꼭 움켜쥐고 문구점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에게 뭘 선물해 줘야 하나 고민하며 이것저것 물건들을 들었다 놨다 했을 것이다. 불빛이 반짝거리는 휴대폰 고리가 딱 마음에 드는데 그건 2000원이라고 하니 살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긴, 요즘 돈의 가치로 따져 보자면 아마도 500원으로 살수 있는 게 도무지 없기는 없었을 것이다. 선물을 고르는 그 짧은 순간, 아이의 고운 마음이 절로 느껴져 코끝이 시큰해졌다.

'무자식 상팔자'고, '자식새끼 애물단지'라는 그 말, 천만의 말씀이다. 이렇듯 고운 모습으로, 이렇듯 평화로운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딸아이. 이 아이가 있기에 이렇듯 행복한 것을. 이 아이가 있기에 내 팔자가 이렇게 상팔자인 것을.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세상살이라는 게, 아니 세상살이의 맛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다. 오늘밤. 난 쉬 잠들지 못할 것 같다. 딸아이의 보송보송한 볼에 엄마의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태그:#딸, #휴대폰 고리, #생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