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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딸아이가 또 내 주위를 뱅뱅 돌았다. 분명 무슨 사연이 있는 듯했다. 순간 야릇한 설렘에 가슴이 뛰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기에 저리 뜸을 들이나 싶었다. 아이를 향한 그 짧은 기다림. 포도 알 같은 까만 눈망울을 굴리며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는 딸아이. 달싹거리는 아이의 입술을 나는 또 이리저리 살피고, 아이와의 그 짧은 신경전에 난 적당한 행복마저 느꼈다. 이윽고 아이의 입이 열렸다.
"엄마. 엄마 생일 미리 축하드려요. 그리고 이거."
"이게 뭐야?"
"불빛이 반짝반짝 거리는 게 마음에 들었는데, 그건 2000원이래요. 그걸 사 드리고 싶었는데."
"어머. 예뻐라. 휴대폰 고리네. 정말 너무 예쁘다. 복희야. 고마워. 정말 고마워."
"엄마. 정말 좋아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2000원짜리는 이거보다 몇 배는 더 예쁜데. 이건 500원짜리예요. 그래서 엄마가 실망하실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아니야. 정말 마음에 들어. 누가 선물해 준건데. 이 세상에서 이 휴대폰 고리가 아마도 제일 예쁠 거야."
"그래도 저는 2000원짜리가 더 예뻤어요. 그래서 꼭 그걸 선물해 드리고 싶었는데, 지금도 2000원짜리만 생각하면 속상해요."
"아니야. 복희야. 정말 마음에 들어. 이 물건의 가격은 500원일지 몰라도 복희 마음은 이 세상에서 제일 값비싼 선물이니까."
"엄마. 정말이죠? 거짓말 아니죠? 정말 실망 안 하는 거죠? 정말 마음에 드는 거죠? 그럼 믿을게요. 그런데 저 뭐 먹을 것 좀 주세요. 배고파 죽겠어요."
"왜? 오늘은 떡볶이 안 사 먹었어?"
"네. 엄마 생일 선물 사느라 못 사 먹었어요."
"그럼 언니 오빠들 떡볶이 먹을 때 넌 뭐 했어?"
"그냥 놀았어요. 언니 오빠들 나올 때까지 뜀뛰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
딸 때문에 감동 먹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요즘 말로 감동을 먹은 것이다. 먹는 것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먹성 좋은 아이인데, 거기다 떡볶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이인데, 거기다 덧붙여 운동하고 나서 언니 오빠들하고 먹는 떡볶이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아이인데.
그런데 엄마 생일 선물을 사려고 그 맛있는 떡볶이를 안 사 먹었단다. 언니 오빠들 다 먹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느라 혼자 뜀뛰기도 하고 달리기도 했단다. 가슴이 불에 닿은 듯 뜨거워졌다.
그런데 불빛이 반짝거리는 2000원짜리 휴대폰 고리가 아무래도 더 좋아 보였는데 그걸 사지 못해 아이는 너무 속상하단다. 그리고 500원짜리 생일 선물을 받고 어쩌면 엄마가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이는 걱정을 많이 했단다. 그래서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엄마 주위를 뱅뱅 돌았단다.
뜨거워진 가슴으로 아이를 힘껏 끌어안았다. 아이의 머리에서 땀 냄새가 텁텁하다. 이렇게 땀을 흘리며 뛰고 구르고 했으니 배는 오죽 고플까. 당장 아이에게 먹을거리를 챙겨 주는 게 먼저이건만, 나는 딸아이를 품에서 풀어놓고 싶지 않았다. 가슴이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으므로.
딸아이는 동전 5개를 꼭 움켜쥐고 문구점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에게 뭘 선물해 줘야 하나 고민하며 이것저것 물건들을 들었다 놨다 했을 것이다. 불빛이 반짝거리는 휴대폰 고리가 딱 마음에 드는데 그건 2000원이라고 하니 살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긴, 요즘 돈의 가치로 따져 보자면 아마도 500원으로 살수 있는 게 도무지 없기는 없었을 것이다. 선물을 고르는 그 짧은 순간, 아이의 고운 마음이 절로 느껴져 코끝이 시큰해졌다.
'무자식 상팔자'고, '자식새끼 애물단지'라는 그 말, 천만의 말씀이다. 이렇듯 고운 모습으로, 이렇듯 평화로운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딸아이. 이 아이가 있기에 이렇듯 행복한 것을. 이 아이가 있기에 내 팔자가 이렇게 상팔자인 것을.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세상살이라는 게, 아니 세상살이의 맛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다. 오늘밤. 난 쉬 잠들지 못할 것 같다. 딸아이의 보송보송한 볼에 엄마의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