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 스카페타는 미국 버지니아 주의 법의국장이다. 38살의 나이에 법의국장으로 발령받았고, 40살의 나이로 <법의관>에 등장한다. 채 마흔도 되기 전에 한 주의 법의국장이 된 여성. 전형적인 커리어 우먼이자 자신의 일에 대해서 확신이 있는 맹렬여성이 떠오를지 모르겠다.
물론 이런 이미지도 어느 정도는 들어맞는다. 스카페타는 법학과 의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고, 법의학자이면서 동시에 변호사 자격증까지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이런 만큼 자신의 업무영역에 대해서만큼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피해자가 잔인하게 살해당한 현장에서 시신을 다루는 방식, 부검실에서 자신이 행하는 부검에 대해서도 전혀 머뭇거림이 없다.
하지만 스카페타 박사는 대인관계만큼은 그다지 원만하지 못하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감정과 기분에 충실하다. 그래서인지 10살짜리 조카 루시에게 언성을 높이기도 하고, 형사부장인 '마리노'와는 항상 티격태격한다. 동물과 여성을 학대하는 사람에게 서슴없이 분통을 터뜨리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면 때문에 스카페타는 법의학자가 되었을지 모른다. 살아있는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 보다는, 조용한 부검실에서 살해당한 시신을 부검하는 것이 오히려 더 마음이 편했던 것 아닐까?
스카페타의 주위에는 개성적인 조연이 있다. 형사부장인 피트 마리노, FBI 심리분석관인 벤턴 웨슬리가 그 인물이다. 이 세 명은 각기 다른 영역을 상징한다. 스카페타는 법의학을 바탕으로 한 과학수사, 마리노는 고전적인 탐문수사, 그리고 웨슬리는 심리분석을 담당한다. 사건이 발생하면 누군가가 제일 먼저 현장으로 달려가겠지만, 현장에서 이 세 명은 항상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인물, 스카페타의 조카인 루시가 있다. <법의관>에서는 10살의 나이로 등장하지만,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루시도 성장한다. 루시가 성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스카페타 시리즈의 커다란 재미중에 하나다. 마리노의 표현을 빌리자면 루시는 이 시리즈의 '와일드 카드'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90년에 발표된 <법의관>이 성공한 것은 이런 면들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였다. 당시만 해도 생소한 개념이었던 법의학과 과학수사, 심리분석 그리고 탐문수사가 하나로 합쳐진 작품, 이상심리의 연쇄살인범을 추적해가는 재미, 그리고 생생한 등장인물들. 이러고도 성공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법의관>은 미국의 에드가 앨런 포 상, 영국추리작가 협회 신인상을 비롯해서 5개의 세계적인 상을 휩쓸었다. 법의학과 과학수사를 바탕으로 한 추리소설이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스카페타 시리즈, 10년 동안 어떻게 변해왔을까?
<법의관>의 성공에 작가인 퍼트리샤 콘웰은 깜짝 놀랐을지도 모른다. 콘웰은 애초부터 이 등장인물들을 시리즈로 끌고 가겠다고 계획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갑작스런 성공에 놀라서 얼떨결에 밀어 부치게 된 것일까?
'스카페타 시리즈'는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90년에 첫 작품이 발표된 이후로 무려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 시리즈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현재 14편까지 출간되어 있다. 그리고 미국에서 2000년에 발표된 11번째 작품인 <마지막 경비구역>이 최근에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법의관>으로부터 10년, 스카페타 박사의 10년 세월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스카페타 시리즈도 물론 10년 동안 변화가 있었다. 40살에 등장했던 스카페타는 40대 중반이 되었고, 10살이던 루시는 20살을 훌쩍 넘겼다. 주요 등장인물 중 한명이 무대에서 퇴장했고, 스카페타는 여전히 그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작가인 퍼트리샤 콘웰은 억만장자가 되었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스카페타는 계속 주위의 음모에 시달리고 있고, 마리노는 항상 삐딱하다. 루시는 세상에 대한 분노의 힘으로 자신을 지탱해가는 것만 같다. 이들은 마음속 깊이 서로를 아끼지만, 함께 모이는 자리에서는 그다지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지 못한다.
그동안 범인들도 변했다. <법의관>에 등장했던 싸이코 연쇄살인범과 비슷한 범인들이 여전히 판을 치지만, 범인들은 조금 더 지능적이 되었다. 스카페타는 남녀 커플로 범행을 저지르는 2인조를 추적하기도 하고, 거대 조직과 맞서기도 한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넘어온 '늑대인간'에게 습격받기도 한다.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어온 10년 세월인 것이다.
하지만 범인들과 맞서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 더해서 스카페타는 자신을 시기하고 질시하는 주위 사람들의 중상과 모략에 시달린다. 모든 적은 내부에 있다고 하던가? 스카페타는 앞으로는 범인들을 추적하면서 뒤로는 자신을 음해하려는 세력과 끊임없이 마주친다. 그리고 이런 음모가 극대화된 장면은 <마지막 경비구역>에 등장한다.
11번째 스카페타 시리즈 <마지막 경비구역>
전작인 <흑색수배>를 주의 깊게 읽어본 독자라면, 아마도 <흑색수배>에서 스카페타가 겪었던 악몽이 이후에도 이어질 거라고 짐작했을지 모른다. <마지막 경비구역>은 <흑색수배>의 마지막 장면에서 채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시작한다. 늑대인간에게 습격 받았던 스카페타는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있고, 주변의 인물들은 피해자인 스카페타를 서서히 조여 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연달아서 발견되는 변사체들. 스카페타는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갈까?
스카페타 시리즈는 분명히 작가인 퍼트리샤 콘웰에게 부와 명예를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작가가 이 시리즈를 20년 가까이 유지해온 결과이기도 하다. 동일한 등장인물들을 내세운 시리즈를 20년 가까이 끌어온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려운 일이다. 퍼트리샤 콘웰은 이 시리즈를 단순하게 끌어온 것이 아니라, 발표하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로 만들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만족시키면서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온 것이다. 이 비결은 무엇일까?
"내 책이 항상 일정 수준을 유지하는 것은, 새 책을 쓸 때마다 더욱 심혈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으니까 이제 여유를 부려볼까, 이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자기 일을 즐기고 잘 해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스카페타 시리즈를 읽다보면, 퍼트리샤 콘웰의 이 말에 공감하게 된다. 베스트셀러 작가의 상투적인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스카페타 시리즈에서는 아직까지 시리즈에 생기기 쉬운 한계나 권태로움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그것은 계속 노력하는 퍼트리샤 콘웰의 모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호기심이 조금 생겨나기도 한다. 과연 콘웰은 언제까지 이 시리즈를 유지할 작정일까? 이러다가 나이 마흔이 된 루시를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것은 그냥 유쾌한 상상일 뿐이다. 스카페타 시리즈를 열심히 읽어온 독자라면, 아마도 등장인물들을 놓고 이런저런 가정과 상상을 한 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이런 것 또한 시리즈를 읽는 재미 아닐까. 그렇다면 독자로서 조금 더 욕심을 부려도 좋을 것 같다. 이 시리즈가 좀더 오래되길 바라는 욕심을. 퍼트리샤 콘웰 같은 대형작가와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분명 행운일 테니까, 이 행운이 좀더 유지되길 바라는 욕심을.
덧붙이는 글 | 퍼트리샤 콘웰 지음 / 홍성영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