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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급작스럽게 장준혁이라는 인물이 죽는 바람에 충격이 컸는지, 괜히 에릭과 정유미가 출연하는 새 드라마 홍보가 욕을 먹기도 했다. 불륜스런 드라마 광고가 <하얀 거탑> 속 장준혁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청자의 마음에 불쾌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장준혁의 죽음은 여러 가지 생각할 점을 전해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선 조금 더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장준혁의 말과 행동이 아니라 장준혁이라는 인물, 아니 우리가 처한 조건이다.

병원 자본의 처지에서는 <하얀 거탑>의 장준혁은 아주 유용한 수단이었다. 국내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의사가 있을수록 장사가 잘되기 때문이다. 지칠 줄 모르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기술과 능력을 확보하는 의사가 많을수록 병원 자본을 증식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BRI@비록 그가 환자에 대한 애정이 넘쳐서 그런 것인지, 자신의 야심 때문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자본의 증식 논리만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상관이 없다. 장준혁이 의료사고를 일으켰을 때, 장준혁을 도와준 것은 인간 장준혁에 대한 의리 때문이 아니라 병원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자본의 증식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단순히 인간욕망이나 권력-정치적 차원의 접근이 지니는 한계다. 대형병원은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 간과된 것은 아닌가 하는 점 때문에 그렇다.

물론 장준혁의 죽음은 결국 의사도 결국 인간이며, 병에 걸려 죽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못 박는다. 따라서 환자와 의사의 이분법적 도식을 무너뜨린다. 이러한 탈근대성은 이미 <외과의사 봉달희>에서도 등장한다. 이건욱(김민준)은 폐암에 걸리고 만다. 아니 미국의 무수한 의학드라마에서 묘사된 부분이다.

다만, <외과의사 봉달희>에서 이건욱은 살지만, <하얀 거탑>에서는 장준혁은 죽었다. 그의 죽음은 인간의 처절한 욕망이 지니는 한계를 극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이건욱은 욕망도 없는 단순한 휴머니스트일 뿐이지 않고 의사와 환자의 경계 허물기라는 의미만 보였다.

이건욱은 스스로 자신을 죽일 명분이 없었는지 모른다. 장준혁의 몸은 스스로 자신을 죽였는지 모른다. 상고한 의료소송에서 진다면, 결국 파멸로 치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대형 자본의 병원이 자신에게 치명적인 이미지 손해를 입힌 의사를 살려둘까.

아마도 장준혁을 버릴 공산이 크다. 이는 장준혁의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다. 어쩌면 이를 예견한 듯 급격하게 암이 악화하였는지 모른다. 장준혁이 남긴 편지에서 밝혔듯이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급속하게 전이된 것을 볼 때 말이다. 자신을 스스로 죽임으로써 불명예와 '버림받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불명예와 버림 속에서 다른 병원으로 간다는 것은 장준혁에게 의미가 없다.

어쩌면 이순신 장군이 자신의 앞날을 염려해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일으켰던 것과 유사한 면이 있다. 이러한 면에서 <불멸의 이순신>의 이순신이나 <하얀 거탑>의 장준혁은 닮았다면 배우 김명민은 어쩌면 같은 위치에 처한 인물을 연기한 것이 된다. 물론 비약의 소지가 있다. 이순신과 장준혁을 비교했으니 말이다. 적어도 인성 면에서는 같지 않다. 장준혁이 악인이 아니라고 해도 악인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비교해 보면, 이순신이 아무리 영웅이 되어도 그는 무장일 뿐이고, 신하일 뿐이다. 임진왜란에서 뛰어난 무공으로 체제를 지켜준 이순신. 그러나 그는 그 체제를 위협하는 한에서는 버림의 대상이 된다.

장준혁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그는 과장일 뿐이고 대형 병원 자본에서는 하나의 부품이다. 결국 그가 고군분투해서 오른 자리는 과장에 불과했으며 그마저도 언제든지 교체 가능한 자리였다. 그가 병원자본에 손상을 준다면 버림의 대상이 된다. 그가 이익이 될 때는 다른 병원으로 이동하는 것을 병원 시스템은 허용하지 않았다. 오로지 이곳 외과라는 한쪽 귀퉁이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대단해 보이지만 이 별거 아닌 자리를 위해 평생 애지중지, 희로애락을 겪으며 살아간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장준혁에 동일시를 느꼈다.

정작 슬픈 것은 장준혁이라는 인물은 갔지만, 대형 자본을 움직이는 브레인들이나 권력자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대형 자본의 병원 시스템도 여전히 살아 자신을 증식한다. 이를 가볍게 보고 무조건 화해를 지향하는 <하얀 거탑>이 지니는 한계였다. 이들 시스템은 장준혁이 가도 다시 제2의 장준혁으로 대체시킨다. 평범한 이들, 가난한 집 자식으로 성공을 꿈꾸는 이의 운명이 대형 시스템에서 어떻게 고군분투하다 사라지는가를 암시한다.

애초에 과장(課長)이라는 자리의 과장(誇張)이 지니는 한계는 여기에 있었다. 과장이라는 위치의 대단함을 통해 장준혁의 죽음으로 성공에 대한 인간의 집착이 보여주는 허망함을 드러냈지만, 자본과 체제 속에서 한 인간이 지니는 의미와 조건에 대해서는 소홀한 감이 있었다.

이것이 잘한 일도 모든 죄도 모든 담론의 주제가 장준혁이라는 인물의 행동과 말에서만 논하는 것이 무엇인가 부족한 이유다. 인간은 조건과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순신이 처한 조건이나 환경을 통해 그를 구성해 내는 것이 타당한 이유다. 장준혁도 그의 행태나 인성이 아니라 그가 처한 의료 시스템, 대형 병원 자본의 구조 속에서 형상화되었어야 타당했다.

덧붙이는 글 | 데일리안에도 보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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