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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미디어학자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를 뜨겁고(hot) 찬(cool) 온도로 구분했다. 정보가 많아 수용자의 개입 여지가 낮은 매체를 핫 미디어(hot media), 정보양이 적어 수용자의 참여 정도가 높은 매체를 쿨 미디어(cool media)라고 말이다. 상대적인 개념이지만, 그의 매체 구별법에 따르면 신문과 책은 '핫 미디어'가 되고, 텔레비전은 '쿨 미디어'가 된다.

인쇄매체가 지고, 텔레비전 같은 영상매체가 뜨는 시대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도 매체의 '찬 성질'을 닮아 점점 '쿨(cool)'해지고 있는 것 같다.

쿨하다고? 그럼 쿨하다는 건 무슨 뜻일까? 지금까지의 정황을 대충 정리해보면 이렇다. '다른 사람 신경 안 쓰고 개성 있게 살기', '사람과 관계 맺는데 연연하거나 질척이지 않기'. 그 행간의 맥을 짚어보면 '폼생폼사'를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쿨족(族)의 특성은 문화적 텍스트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2006년 독자들의 지갑을 가장 많이 열게 한 책은 제목도 발칙한 <아내가 결혼했다>다. 이 책엔 쿨족의 알파요 오메가인 사랑 방정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결혼은 했지만 뭇 남자와 연애를 하는 아내는 죄의식이 없다.

남자든 여자든 한 사람만 평생 바라보는 것은 쿨족인 그녀에게 '집착'이다. 이런 쿨족의 습성을 민감하게 잘 포착하고 있는 무라카미 류,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 등의 일본 작가들의 소설이 스테디셀러인 이유는, 가족이나 연인, 더 나아가 삶에 집착하지 않고 초월한 듯한 '삶에 대한 쿨한 포즈'를 잘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쿨(cool)족 해부, '박해미'와 '최도영'

▲ <거침없이 하이킥>의 나문희
ⓒ mbc
TV드라마 <거침없이 하이킥>, <하얀거탑>에도 이런 '쿨족'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박해미, <하얀 거탑>의 최도영이 그렇다. 박해미의 쿨한 습성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 '오케이~' 한 마디에 녹아있다. 그녀는 복잡하고 구질구질한 것은 물론 이것도 저것도 아닌 뜨뜻미지근한 상황을 참지 못한다.

그녀의 '오케이~' 한 마디는 이런 복잡하고 불편한 상황을 정리하는 '마술 지팡이'다. 개성이 강하고 리더십이 있어 사람들을 지배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열린 마음도 '오케이' 한 마디로 잊지 않는다. 이런 그녀는 자식들(민호, 윤호)과 남편(식신 준하)에게 쿨한 엄마이자 아내로 자리매김한다.

<하얀거탑> 최도영도 쿨하긴 마찬가지다. 장준혁처럼 카리스마로 좌중을 압도하진 못하지만, 그는 도덕적 신념으로 보통사람들 위에 군림한다. 의사는 환자의 안위와 의학에만 전념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병원 내의 권력 자장 안에 발을 들이길 거부한다. 의사는 병원 내 '직장인'이 아니라 '의술인'이라 생각하기에, 친구인 장준혁에게 '로비'로 승부하지 말고 '실력'으로 승부하라 다그친다.

더 이상 쿨한 캐릭터만 찾지 않는 시청자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시청자들은 '박해미', '최도영' 같은 쿨족이 예전처럼 매력적이지 않은가 보다. 박해미의 시원한 성격과 만능적 재능은 '불편하고 얄밉다'고 한다. 최도영의 의사로서의 도의도 '현실적이지 않다'며 거부한다.

그렇다면 <거침없이 하이킥>과 <하얀거탑>이 시청자를 사로잡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침없이 하이킥>과 <하얀거탑>은 각각 시트콤과 의학 드라마의 새 장을 열었다고 호평 받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의 진정한 매력은 신선한 기획을 현실성 있게 풀어내는 캐릭터에 있다.

<거침없이 하이킥> 나문희는 앉은 자리에서 냉면 세 그릇을 먹고, 혼자 갈비 5인분도 해치우는 주체할 수 없는 식욕의 소유자다. 그러나 극중 나문희의 매력은 이런 엽기성에 있지 않다. 나문희가 집안 일 파업에 들어가자 이순재는 파출부를 고용한다(36회). 이에 며느리 박해미는 '돈 주고 쓰는 사람이니 편하게 부리세요, 집안일 도와주는 게 그 사람들 일이예요'라며 사람 쓰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문희는 아무리 돈을 주고 불렀지만 사람 부리는 일이 영 불편하다. 그리곤 퇴근 하는 파출부를 불러 고생했다며 검은 비닐봉지 한 가득 먹을 것 챙겨주는 일을 잊지 않는다. 평소엔 주책 맞지만, 가슴은 언제나 따뜻한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 <하얀거탑>의 장준혁
ⓒ mbc
<하얀거탑> 장준혁은 최고 외과의사이다. 그럼에도 그는 실력 외에 성공에 있어 현실 정치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낮엔 하얀 가운을 입고 환자들을 진료하고, 밤엔 어두운 술집에 앉아 정치력을 키운다. 외과 과장으로 사람들 앞에 서기까지 그는 사람 줄대기라는 진흙탕을 건너왔다.

고고하고 확고한 의지로 낮엔 환자들과 동료 의사들의 부러움을 사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 남기 위해 처참하게 물 밑 발길질 중이다. 백조처럼 말이다. 현실에 사람들과 부대끼며 생업 전선에서 저마다 '잔존'을 고민하고 있는 우리들이기에 '폼생폼사'라지만 절대 쿨 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생을 달리했지만 악역 장준혁이 시청자들의 가슴 속에 여전히 살아 있는 이유이다.

핫(hot)족(族), 기지개를 펴다

과연 우리는 쿨 할 수 있을까?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위로도 받고, 경쟁을 하며 상처도 받는데 '다른 사람 신경 안 쓰고 개성 있게 살기', ' 사람과 관계 맺는 데 연연하거나 질척이지 않기'라니. <거침없이 하이킥>의 나문희, <하얀거탑>의 장준혁을 사랑하는 당신은 분명 절대 쿨할 수 없는 현실인(人), 그래서 핫(hot)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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