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7일, 눈이 펑펑 내렸다. 한창 눈이 오던 연말연시를 동남아에서 보냈으니 겨울이 지나고서야 첫 눈을 본 셈이다. 그 정도로 눈이 내리면 웬만해선 바깥에 나가지 않는다. 하지만 한 시간 가까이 지하철을 타야하는 나름대로 먼 길을 향했다. 잠실 체육관에서 열리는 뮤즈의 내한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뮤즈는 최근 등장한 록 밴드들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본국인 영국 못지않은 인기를 한국에서도 누린다. 비록 본국에서 한창 성공 가도를 달릴 때인 3집 < Absolution >에 담겨있는 'Time Is Running Out'이 CF에 쓰이면서 이 땅에서도 지각 인기를 얻었지만, 광고 음악 하나만으로 떴다가 사라지는 다른 뮤지션에 비하면 굉장히 꾸준하고 드높다.
지난 가을 이래 최근까지 이들은 포털사이트 네이버 외국 가수 검색 순위에서 1위를 놓치지 않았다(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여전하다). 한 게임 방송 프로그램의 로고송으로 쓰였던 'Super Massive Black Hole'이 담긴 4집 < Black Hole And Revelations >은 록 음반으로서는 이례적으로 1만장이 넘게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1999년 < Showbiz >로 데뷔했을 때 이들은 당시 등장한 대부분의 영국 밴드처럼 라디오헤드의 아류로 취급 받았었다. 하지만 그 뒤 앨범을 낼수록 다른 밴드들과는 달리 자신들의 정체성을 쌓아왔다. 애초에 이들이 속해있던 영토는 브릿 팝, 또는 90년대 모던 록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영토를 계속 넓혀왔다.
누가 모던 록 밴드 공연에 '액션'이 없다 했는가
우리나라에서도 이들의 팬이 비단 모던 록 애호가에 한정되어있지 않은 이유도 바로 그 넓은 영토에 있다. 뮤즈는 라디오 헤드의 감성과 퀸의 드라마틱함, 헤비메탈의 과격한 사운드를 모두 갖고 있는 밴드다.
화려한 기타 솔로가 지나가면 아름다운 멜로디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진다. '과격하게 울어댄다'라고 설명할 수 있는 매튜 벨라미의 보컬은 청승맞지만 공격적이다. 가성으로 일관하면서도 목소리에 담겨있는 파워는 여느 록 보컬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헤비메탈부터 모던 록 팬까지 그들의 음악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던 록의 감성을 심으로 삼고, 헤비메탈의 사운드로 나무삼아 이를 감싸고, 프로그레시브 록의 드라마틱한 구성으로 색을 입힌 연필 같은 음악이다. 이 점은 우리나라의 록 밴드들이 보다 많은 대중성을 획득하기 위해 참조해야할 사항이기도 하다. 남성호르몬과 여성호르몬이 동시에 분비되는 음악, 그게 뮤즈의 핵심이다. 강(强)과 유(柔)의 오의를 동시에 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뮤즈의 내한 공연이 확정되고, 이들의 앨범을 산 사람보다 더 많은 인원이 예매 사이트에 몰렸다. 티켓 오픈과 동시에 스탠딩 구역이 매진됐고 예매 사이트 순위에서 동방신기와 1위 자리를 다투기도 했다. 그런 예매 전쟁을 거치고 눈보라를 뚫고 잠실에 도착한 사람들이 7천여명.
지방 관객들이 대절한 버스도 적잖이 공연장 앞에 세워져있었다. 2000년대에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해외 밴드로서는 단연 압도적인 관객 인원이었다. 그리고 공연 예정 시간인 저녁 8시를 약 30정도 넘겨 무대에 불이 꺼졌다.
그렇게 시작된 뮤즈의 첫 한국 공연은 광란의 진혼 미사에 다름 아니었다. 검정 연미복을 입고 등장한 매튜 벨라미는 그 미사의 지휘자였다. 그는 한 순간도 몸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첫 곡 'Take A Bow'부터 마지막 곡 'Knight Of Cyclonia'까지 그는 뛰고 춤추고 흔들었다.
공연 중반 기타를 놓고 피아노를 치며 노래할 때는 리스트를 존경한다는 평소의 언급대로 여느 클래식 피아니스트 못지않은 광기를 뿜어냈다. 누가 록 밴드의 공연에, 특히 모던 록 밴드의 공연에 액션이 없다고 했는가. 뮤즈는 그런 선입견을 일거에 날려버리고도 남았다.
미소에서 감탄으로 진화한 관객들의 '표정'
과연, 최고의 라이브 밴드라는 소문은 정확했다. 명불허전 그 자체였다. 하지만 매튜 벨라미가 그렇게 무대를 휘젓고 마음껏 연주하고 싶은 걸 연주할 수 있었던 건 탄탄한 리듬 섹션이 뒷받침되기 때문이었다.
크리스 볼첸흠은 단순히 리듬만 연주한 게 아니라 온갖 이펙터를 동원해가며 기타의 영역까지 수행했다. 시종일관 난타에 난타를 거듭하는 도미닉 하워드의 드럼은 이들이 헤비 사운드의 영역까지도 넘나들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무대 옆에 달린 스피커에서 뿜어 나오는 거대한 소리 못지않게, 관객들은 거대한 싱얼롱을 무대에 쏘아냈다. 마치 누구의 소리가 더 거대한지 경쟁이라도 하듯, 환호하고 함께 노래하며 박수치고 점프했다.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던 'Starlight'에서는 스탠딩석부터 3층까지 모두 메튜 벨라미의 동작에 맞춰 함께 박수 쳤으며 그 뒤에 이어진 이들의 대표곡 'Plug In Baby'에서 객석의 합창은 마침내 무대를 넘어섰다.
거음(巨音)의 지휘자와 성도들이 만들어내는 부흥의 하모니가 때 아닌 눈보라에 용암처럼 쏟아졌다. 앵콜까지 모두 마친 메튜 벨라미가 싱긋 웃으며 'See you soon'이란 멘트와 함께 퇴장할 때까지.
공연장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이어폰을 나눠 낀 20대 중반커플이 살그머니 박수 치고 있었다. 짝 짝짝, 짝 짝짝짝. 짝 짝짝, 짝 짝짝짝. 그 박수가 몇 번 반복되었을 때 내 헤드폰에서'Starlight'이 흘러 나왔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뮤즈가 이 노래를 연주할 때 관객과 함께 하는 그 박수를 그 커플도 미리 연습하고 있었다. 나도 조용히 함께 박수 치는 시늉을 했다. 그들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 미소를 지었다. 공연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는 모든 관객의 표정은 그런 미소에서 감탄으로 진화해 있었다. 여전히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그 누구도 추워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