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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혜
지난 13일, 한 포털사이트의 교육 기사 제목에 시선이 잡혔다. '대학 새내기 80%, 부모 이름 한자로 못써'라는 제목이 붙여진 기사였다. 제목으로 보아 굳이 기사의 내용을 확인해 보지 않더라도 그 내용을 알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 내용이 궁금한 건 왜였을까? 아마도 '초록은 동색'이라는 동지 의식 때문인 것 같았다.

기사의 내용은 이명학 성균관대 사범대학장(한문교육)이 '기초 글쓰기' 과목을 수강하는 이 대학 새내기 384명을 대상으로 간단한 한자 시험을 본 결과 77%가 아버지 이름을, 83%가 어머니 이름을 한자로 쓰지 못하거나 틀리게 썼으며, 자기 이름을 정확히 쓰지 못한 경우도 20%나 됐다는 것이다.

순간, 웃고 말았다. 기사에서 말하는 대학 새내기들은 바로 1년 전 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아주 똑같지는 않다. 궁색한 변명이라도 해볼라치면, 그래도 나는 부모 이름이나 내 이름 정도는 쓸 줄 알고, 한문 섞인 일부 문장이라든지 신문도 더듬거리며 읽을 정도는 되니 그네들보다 조금은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더 나을 것도 없다 싶은 것이.

요즘은 국어 교과서 내에도 한자가 거의 사라졌고 초·중학교는 학교장 재량으로 일부 학교에서만 한자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또 고등학교 2, 3학년 선택과목에 한문이 있기는 있지만 수능에서 한문을 선택하는 학생은 거의 없으며, 거기다 언어 영역에선 한자가 출제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지만 나 같은 경우는 고등학교 때 한문을 배웠다. 학력고사로 인하여 그나마 1학년 때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한자엔 까막눈 수준인데 지금의 대학 새내기들이야 말해 무엇할까 싶다. 굳이 이유를 갖다 붙이자면, 입시 위주의 현 교육 정책이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갓스물이 된 그들이나 그들보다 20여 년을 더 살아온 1년 전의 나와 한자에 있어 까막눈인 것은 별반 다름이 없어 한심한 웃음만 실실 배어 나왔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1년 전 내가 아니다. 왜? 난 이제는 한자에 까막눈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책 펼치는 순간, 난 졸도할 것 같았다!

작년, 마흔셋이라는 늦은 나이에 방송통신대학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입학 전, 어찌나 들떠 있었던지, 배도 고프지 않고 잠도 오지 않았다. 무엇이 되었건, 새로운 걸 배우는 일엔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덤벼드는 사람이 바로 나란 사람이다.

그러니 대학이란 이름 앞에, 또 무궁무진하게 펼쳐질 학문이란 미지의 세계 앞에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설렘은 언제 터질지도 모르면서 대책 없이 부풀어만 오르는 풍선 같았다.

입학 전, 교과서가 미리 도착했다. 대학 교과서는 어떤 내용들이 들어 있나 싶어 급하게 몇 장 넘겨보았다. 그러나 책을 펼치는 순간, 난 졸도할 것 같았다. 빼곡히 박혀 있는 '한자'라니…. 득달같이 달려드는 두려움에 한껏 부풀어 오르던 설렘의 풍선은 '뻥'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터져 버렸다. 이어 피시식 바람 빠지는 소리….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마침 집어든 교과서는 중국 문화 개관이었다. 중국 문화 개관은 아예 한자 책이었다. 무심히 펼쳐든 페이지, 슬금슬금 읽어 내려가다 보니 어쩌나…. 채 한 줄도 마저 읽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책을 집어들고 건성으로 몇 장 넘겨보았다. 마찬가지였다. 중국 문화 개관보다 한자의 비율이 덜할 뿐이지 다른 교과서에도 한자는 수두룩했다.

입학 전, 본격적인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그래도 교과서는 한 번 읽어 봐야 한다는 게 마땅한 배움의 자세라 생각했다. 그러나 읽어보기는커녕 구경만 하는데도 현기증이 나니, 시작도 하기 전, 난 이미 대학 공부란 것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두렵다고 덜덜덜 떨고만 있으면 요술처럼 한자가 한글로 바뀌는 것도 아닐 터. 다음날부터 한자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하는 턱없는 오기에 옥편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역시나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한자의 뜻은 몰라도 음이라도 알면 나았다. 그러나 앞뒤 맞추어 더듬더듬 읽은 음으로 한자를 찾을 수 없을 땐 한자의 총획으로 찾아야 했다. 한 자 한 자 쓰면서 총획을 세어 보고, 그 획수로 옥편을 뒤적여 찾아보면 없을 때가 태반이었다. 이유야 뻔한 거 아닌가. 총 획수가 틀렸기 때문이다. 쓰고 또 쓰고, 세고 또 세고…. 어찌어찌 교과서 한 페이지 읽는데 한나절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한자를 상대로 전면전에 돌입... "받아쓰기 해주실 수 있으세요?"

ⓒ 김정혜
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대학 공부를 1년만 하고 말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자가 1학년 교과서에만 나오는 것도 아닐 터. 원활한 대학 공부를 위해서라도 한자 공부가 꼭 필요한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또 한자는 우리 실생활에서도 꼭 필요한 것.

결국, 한자를 상대로 전면전에 돌입했다. 딸아이의 수학 학습지 선생님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한자 학습지 신청을 하였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을 덧붙였다.

"선생님, 하다 보면 아무래도 처음 마음먹은 것과 달리 게을러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 일주일 치 교재에 대해 받아쓰기를 하고 싶은데 해주실 수 있으세요?"

"어머니도 복희와 같은 금요일 날 학습지를 하셔야 하는데, 그럼 어머니가 받아쓰기하시는 걸 복희가 볼 수도 있을 텐데. 복희 앞에서 받아쓰기하실 수 있겠어요?"


순간,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에 틀리기라도 하면 아이에게 얼마나 부끄러울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오히려 그것이 자극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이에게 부끄러운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한자 공부를 해야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당연히 나태해지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작년 3월, 나는 그렇게 한자 학습지를 시작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오전 10시부터 대략 30분의 시간을 한자 공부에 집중했고, 금요일 오전엔 총 복습을 했다. 그리고 오후에 선생님이 오시면 어김없이 받아쓰기를 했다. 그것도 아이를 감시자(?)로 앉혀 놓고.

1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처음 한 일(一)자로 시작했던 아주 기초적인 교재가 이젠 단어로 접어들다 보니 제법 어려워졌다. 글자 수도 일주일에 평균 30자. 거기다 사자성어까지 합치면 40여자. 그러다 보니 요즘엔 한자 공부가 만만찮다.

지나온 1년은 제법 보람된 시간이었다. 여고 1학년 때의 1년 시간이 한자 공부의 전부였다. 그렇다 보니 한자가 섞인 문장을 읽을 때나 신문을 볼 때 앞뒤 꿰맞추어 그저 더듬더듬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이젠 아니다. 그렇다고 줄줄줄 읽어 내려갈 정도는 아니지만 더듬거리지는 않는다.

그것만 해도 얼마나 큰 수확인가. 무엇보다 모른다는 답답함을 느끼지 않아 좋다. 더불어 안다는 것의 그 후련함. 정말이지 속이 다 시원하다.

다가올 4월에 한자 능력 검정 시험이 있다는 소식에 며칠 전 접수를 했다. 한자 공부를 시작한 지 이제 겨우 1년밖에 안 됐기에 너무 성급한 건 아닌가 우려도 된다. 그러나 한번쯤 평가를 받아 보는 것도 좋을 듯싶어 한자 1000자를 배정한 4급 시험 접수를 해 두었다. 4급 시험은 초등학생들이 대부분 응시한다고 선생님께서 귀띔을 해주셨다.

딸아이 앞에서 받아쓰기도 하는데 까짓 거, 초등학생들 틈에 섞여 시험 보는 게 뭔 대수일까 싶다. 그래서 요즘은 더 바쁘다. 어려워진 교재도 교재이지만 시험공부가 또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자라는 것이 자주 쓰지 않다 보니 일주일쯤 되면 잊어버리기 일쑤다. 일주일 단위로 다시 한번 짚어 두어야 한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한자 공부라는 건, 물론 다른 공부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나 끈질긴 인내를 요구한다.

뭔가를 배운다는 거. 즉, 배움이라는 거. 그건 더부룩한 속을 시원하게 확 뚫어 주는 소화제 같은 것인 듯싶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도 1시간짜리 삶의 소화제 한 알을 삼킨 건가…. 그래서 이렇게 속이 시원한 건가.

#한자#대학#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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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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