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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좀 앉았다가 걸어. 저기 저 호수 물 좀 봐, 반가워 죽겄어.
예 좀 앉았다가 걸어. 저기 저 호수 물 좀 봐, 반가워 죽겄어. ⓒ 김 관 숙
걷기운동으로 겨우 내내 우리 동네 울타리를 따라 돌다가 요즘은 날씨가 푸근해서 우리 동네와 조금 떨어져 있는 석촌 호수로 가고는 합니다. 호숫가 주변 벚나무와 개나리들이 제법 봄기운을 물었습니다. 양지바른 쪽에 개나리들은 꽃봉오리들이 푸릇 노릇 합니다. 그 예쁜 꽃봉오리들이 밤새 얼마나 부풀었는지 궁금해서 오늘 역시 석촌 호수 쪽으로 발길이 돌려졌습니다.

아직 푸릇 노릇 합니다
아직 푸릇 노릇 합니다 ⓒ 김 관 숙
큰 길에서 숲길로 들어와 호숫가 길로 내려 가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이봐아-"하고 아주 반가워하는 소리로 나를 부릅니다. 돌아보니 동네 어르신이 양지바른 나무의자에 혼자 앉아 있습니다.

"예 좀 앉았다가 걸어."
"여기까지 나오셨네요."

나는 조금 놀랐습니다. 어르신은 퇴행성 관절염이 와서 왼쪽 다리가 불편합니다. 조금 절면서 걸음을 놓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걸음을 놓을 적마다 무릎이 아프다고 합니다.

춥지 않는 날에는 동네 울타리를 따라 하루 이십 분 정도씩 걷기운동을 하고는 하시는데 오늘은 너무 무리를 하신 것 같습니다. 더구나 우리 동네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복잡한 잠실역 지하도 상가를 거쳐야 합니다.

잠실역 지하도 상가는 작년 여름부터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해서 올 1월 말에 끝냈는데, 대형마트가 있는 백화점과 잠실역으로 가는 통로인데다가 새로워진 상가 풍경 때문인지 전보다 사람들이 더 많이 붐빕니다.

우리 동네 울타리를 나와 지하도로 내려갈 때는 엘리베이터를 탑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부터는 불편한 다리로 그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지하도 상가를 지나고, 분수 광장을 지나고, 백화점과 붙은 호텔이 있는 3번 출구 쪽 층계를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석촌호수로 가게 됩니다. 어르신에게는 어려움을 겪는 일인 것입니다.

"여기까지 힘 드셨죠?"
"사람들 구경도 하구 마냥 마냥 왔지 뭐. 저기 저 호수 물 좀 봐, 반가워 죽겄어. 어구, 얼마만에 왔나 몰라. 다리 안 아플 때 와 보구 첨이라구."

어르신은 호숫가 길까지 내려가지 않고 이 자리에 앉아 호수를 내려다 보고만 있었다고 합니다. 거뭇 거뭇하던 어르신의 얼굴이 유난히 뽀애졌습니다. 분 치장을 하셨나.

"얼굴이 좋아지셨어요."
"참, 자넨 모를 거야. 나 검버섯 수술했다구. 자네 여행 간 동안에 말야."

"잘 하셨어요. 훨씬 젊어 보이세요."
"젊어 보이구 뭐구, 아휴, 속상해 죽겄어. 수술하구 오니까 글쎄 아들눔이 면박을 주는 거야. 철따구니 없게 말야. 그때 그 말이 여직 귀에 쟁쟁해."

"왜요?"
"내 나이가 내년이면 꼭 팔십이라구. 아들 말이 '그냥 사시지 뭘 그런 걸 하냐'는 거야. 지 마누라 눈꺼풀 늘어져서 쌍꺼풀 수술한 거는 아무 말 않구, 나 검버섯 수술 한 거는 뭐라구 하는 거야. 것두 내가 용돈 모아 한 거라구. 난 깨끗한 얼굴루 살다가 죽구 싶어서 했다구."

나는 웃기만 합니다. 이런 때는 뭐라고 위로의 말을 드려야 할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요즘은 부모님에게 검버섯 수술을 시켜 드리는 것도 효도라고 합니다. 내가 생각해도 효도 관광보다 찜질방 이용권 뭉치보다 검버섯 수술을 시켜 드리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남에게 좋은 인상을 주며 깨끗하게 늙고 싶기 때문입니다.

"백화점 같은 데 가서 뭘 하나 사려고 기웃거리면 노인들은 쳐다도 안 본다구. 젊은이들이 가야 점원들이 쫓아와서 어쩌구 저쩌구 말 붙이구 권하구 그러지. 옛날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은 대접받구 살려면, 늙은 거야 어쩔수 없지만, 행색이 좋아야 하구 얼굴두 깨끗해야 하구 그래야 헌다구. 내 말이 틀렸냐구?"
"아뇨, 다 맞는 말씀이세요. 스포츠 복 좋은 거네요. 잘 어울리셔요."

나는 분위기를 바꾸려고 말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빗나갔습니다. 어르신이 분을 벌컥 쏟아 냈습니다.

"이것두 내가 사 입었다구! 새마을 시장 가서. 지들은 메이커 사 입었잖아. 내가 걷기운동 하는 걸 알면서두 지들만 사 입었다니깐!"

'그럴리가요, 미처 생각을 못했겠지요'라는 말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습니다. 해 봤자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 같아서입니다. 어르신의 아들 며느리는 착하고 반듯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아들이 어르신 말씀대로 '철따구니' 없는 말을 하였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어르신이 고령이라서 수술 후유증이 생기면? 하는 마음이 그런 말로 표출이 되었을 것도 같습니다.

어르신의 감색 겨울 스포츠 복은 내가 입은 붉은 벽돌색 스포츠 복과 똑같은 모양새입니다. 나는 동대문 평화시장에 가서 사 입었습니다.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싸고 좋은 것들이 많아 옷을 살 때는 큰 시장 구경도 할 겸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그 곳으로 가고는 합니다.

"저도 이거 시장 옷이에요. 편하구 좋아요."
"이제 보니 내 거랑 똑같네. 내 것두 편하구 좋다구. 허긴 편하구 좋으면 되지 메이커 입음 얼굴이 달라지나 돈이 생기나."

비로소 어르신은 입가에 웃음을 물었습니다. '그만 일어나자구'하면서 어르신이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어르신은 장갑을 끼지 않은 맨 손입니다. 날씨가 영상 기온이라 해도 아직은 겨울 끝입니다. 움직이지 않고 나무 밑에 오래 앉아 있다 보면 으슬 으슬 추위를 느끼게 됩니다. 고령이신 어르신은 손까지 시려 올 것입니다.

나는 끼고 있던 면장갑을 벗습니다. 어르신 윗 옷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리고 있습니다.

"엉, 왜? 석촌호수 왔다가 막 집에 가는 길이다. 아프지 안 아프냐? 그래두 오구 싶어 왔다구!"

어르신은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말했습니다.

"며느리야. 내가 집에서 나온 지 두 시간이나 됐대나. 하긴 좀 피곤해."
"어서 가세요."

어르신 손에 면 장갑을 끼워드리자 어르신은 아무 말도 안 합니다. 역시 몸이 으슬 으슬 하던 차였나 봅니다. 어르신을 큰 길까지 모셔다 드리고 돌아서려는데 문득 어르신이 하늘을 올려다 보며 말했습니다.

"저런, 저런. 우리 아들눔만 철따구니가 없는 줄 알았더니만!"

올 여름엔 푸른 지붕 이구 살긴 틀렸어!
올 여름엔 푸른 지붕 이구 살긴 틀렸어! ⓒ 김 관 숙
가지 치기를 말끔히 한 가로수 나무 꼭대기에 앉은 까치집이 안쓰러워 보입니다. 어떻게 저렇게 까치집 바로 위에서 나뭇가지를 싹둑 잘라냈을까.

"올 여름엔 푸른 지붕 이구 살긴 틀렸어."
"놀라서 달아나지 않았을까요?"
"갈 데 마땅치 않음 참구 살겄지. 우리 인생두 그런데 지들두 그렇겠지."

어르신은 '어구-' 하면서 다리를 약간 절면서 걸음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곧 회복이 되었는지 온전한 걸음을 천천히 놓습니다.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를 않습니다.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호텔 앞에서 지하도로 내려가는 층계며 그 복잡한 분수대 광장과 지하도 상가도 거쳐 가야 합니다. 생각 같아서는 걷기운동을 그만두고 내가 모시고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나오면 어르신 성품에 한 마디로 거절하실 게 분명합니다.

나는 그대로 호숫가 길로 내려갔습니다. 한낮인데도 걷기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걸음을 아주 빨리 놓아 봅니다. 그래도 마음이 편치를 않습니다. 노란 물을 물은 개나리 넝쿨이며 벗나무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냥 마음이 분주하기만 합니다.

나는 돌아서기로 합니다. 어르신을 동네까지 모셔다 드리고 그 길로 나는 동네 울타리를 따라 걷기운동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큰 길로 나와 호텔 앞까지 오자 어르신이 보였습니다. 호텔 앞에 높이 달려있는 너구리 동상 밑에는 돌 의자들이 많습니다. 어르신은 바로 거기에, 빤히 마주 보이는 돌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라 며느리와 함께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어르신도 며느리도 즐겁게 웃고 있습니다.

석촌호수 쪽을 향해 몇 걸음을 가다가 돌아보니까 그들은 지하도 입구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놓고 있습니다. 며느리가 어르신의 팔짱을 끼고 어르신의 느린 걸음걸이대로 따라 걸어 갑니다.

어르신이 저렇듯이 며느리의 따듯한 효성을 받으면서, 아직도 귀에 쟁쟁한, 아들이 철따구니 없이 면박 준 말을 툭 털어버렸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자식들이 큰 덩치와 달리 철 없는 말을 툭 툭 할 때면 무척 속이 상합니다. 그러나 퇴근해서 현관을 들어서면서 웃는 얼굴로 '엄마 나 왔어' 하든가 '다녀왔습니다' 하면 속상함이 싹 풀리듯이 그렇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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