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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한참 ‘자아실현’이라는 단어가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다. 정확한 의미는 모르지만 왠지 살아 생전 반드시 이뤄야 할 단어인 것 같아서 ‘난 반드시 자아실현 할 거야’하고 외치곤 했다.

당시 내게 자아실현이란 사회에 봉사하는 삶이었다. 80년대 학번도, 운동권도 아니었지만 아직 최루탄 냄새가 나던 91년에 학번을 달았던 나는 사회에 봉사하는 삶이 가장 보람된 삶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삶을 살기 위해 졸업 후 근 일 년을 배회하던 내게 결국 생활고라는 커다란 장애가 다가왔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 주변 사람 고생 그만시켜라.“

과년한 딸이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걸 보고 마음 아파 하시던 어머니 모습이 눈에 선해서, 또 앞으로 먹고 살아갈 문제에 부딪쳐서 그 길을 포기했다.

‘사람이 먹고 사는 일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무슨 보람은, 자아실현이 다 뭐야?’

그때 든 생각이다. 어린 동생들 때문에 인문고 대신 명문 상고에 입학한 아버지의 모습을 새삼 다시 보게 된 것도, 총명하기 이를 데 없어 기대를 한 몸에 모았던 친구가 대학원을 포기했던 것도 그즈음이었다.

출산 후 맡길 곳 없는 아기 육아 때문에 회사를 그만둔 후, 나는 평범한 아줌마가 되었다. 크게 잘살진 않아도 먹고 살 만한 수준의, 말 그대로 평범한 주부인 나. 아기 키우기가 벅차고, 쉴 틈 없이 돌아오는 밥 때 챙기기가 버겁게 느껴져도 먹고 사는 걱정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축복이랴 하며 감사했다.

하지만 문득 문득 이렇게 하루하루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일까 하는 회의감이 밀려왔다. ‘아침 새벽 밥 짓는 일부터 저녁 늦게 아기를 재우는 데서 끝나는 일과가 내 삶의 전부일까? 이렇게 한 번밖에 없는 내 인생은 막을 내리는 것일까?’

하고 싶었던 여러 가지 일들이 떠올랐고, 결혼 전 일 잘한다고 인정받았던 나날들이 벅차게 그리웠다. 다시 오래 전에 넣어두었던 '자아실현'이라는 단어에 매달리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먹고 사는 일은 두 말할 필요 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이 단지 '먹고 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사람이기에, 먹으면 매사가 좋은 동물이 아니기에 그 이상을 꿈꾸게 마련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은 욕구, 아름다운 것을 찾는 마음, 그리고 스스로 성취하고 싶은 욕구가 인간에게 있다.

그러니 ‘먹고 살 만하니 자아실현 타령이다’하면서 무조건 돌을 던질 일은 아니다.

매슬로우(Maslow)는 자아실현을 인간의 최상위 욕구라고 본 학자다, 그는 사람들이 느끼는 다양한 욕구들, 즉 먹고 살고자 하는 욕구(생리의 욕구), 안정의 욕구, 소속의 욕구, 그리고 인지욕, 자아실현의 욕구까지 여러 욕구들이 일정 단계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최하위에는 생리의 욕구가 있고 이 욕구가 해결되면 안정의 욕구, 그리고 나면 소속의 욕구, 자존의 욕구, 그 다음 인지 욕구와 심미욕구가 생긴다는 이론인데, 최상위에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다.

이 이론은 후일 많은 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특히 욕구가 순서대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 즉 하위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사람이라도 상위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 중요한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 비판은 사실 일견 맞는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았더라도 인지의 욕구나 심미의 욕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보통의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아실현을 생각하기는 조금 어렵다. 정말 자식이라도 하나 있으면 자식 배 굶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스스로의 자아실현 따위는 이미 안중에 없게 된다.

그럼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될까? 사람이란 동물이 미묘한건지 오로지 생존에만 만족할 수 없는 존재가 사람이다. 먹고 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오케이인 동물과 달리 인간은 새로운 것을 알고 싶고, 아름다운 것을 찾으며, 또 스스로를 성취하고 싶어 한다. 마음 속에 나를 충일하게 하는 무언가를, 각자 느끼는 것은 다르지만 채우고싶어 한다,

그러한 것을 사치라고 부르기는 참 어렵다. 누구나 한 번 사는 인생이므로 스스로의 자아실현하고 싶은 마음을 무조건 ‘먹고 살 만한 이들의 사치’라며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사람의 먹고 사는 문제와 자아실현, 그 어렵고 미묘한 관계를 푸는 것은 참 어렵다.
매슬로우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먹고 사는 기본적인 욕구가 해결되어야 자아실현의 욕구도 생기고, 먹고 살자니 자아실현은 점점 멀어져 가는데 먹고 사는 데만 만족할 수는 없고...

이 미묘한 관계를 풀 수 있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이라고, 어느날 매슬로우의 욕구 위계론을 떠올리면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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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민은 기자다! 라는 모토가 신선했습니다. 과거와 달리 각 블로그와 게시판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시대에는, 정보의 생성자가 모든 이가 됩니다. 이로써 진정한 언론과 소통의 자유가 열렸다고 생각합니다. 또 변의 일상적인 이야기도 알고 보면 크면 크고 중요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여성, 특히 아줌마들의 다양한 시각, 처한 현실 등에 관심이 많고, 이 바께 책이나 정치 분야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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