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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릴리엔탈이 직접 만든 글라이더로 비행하는 모습.
오토 릴리엔탈이 직접 만든 글라이더로 비행하는 모습.
세계 최초로 글라이더를 발명하여 인간의 활공비행을 가능하게 했고,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독일인 오토 릴리엔탈. 그는 단순히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글라이더에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글라이더에 발동기를 장착하여 위험천만한 비행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1896년 8월 9일, 오토 릴리엔탈의 무모한 비행은 성공하나 불의의 사고로 17m 상공에서 추락했다. 어찌 보면 미친 짓처럼 보이는 자신의 시도 때문에 척추가 부러져 죽게 된 그는, 죽음을 앞두고 유명한 한마디를 남겼다.

"희생이란 필연적인 것이다."

과연 그의 죽음은 단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집념에 사로잡힌 미치광이가 만들어낸 해프닝에 불과했을까? 그의 시도는 우리가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거대한 비행기를 만들어내는 어마어마한 결과를 가져왔음엔 부인할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난잡한 추모행사?

'문화공장'의 입구
'문화공장'의 입구 ⓒ 서진석
지난 3월 16일, 그렇게 자신의 신념을 이루려는 새로운 시도에 목숨을 바쳤던 여러 위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행사가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서 열렸다. 그러나 그 추모행사는, 웅장한 장송곡이 울리는 가운데 검은 옷을 입은 추모객들이 줄을 잇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행사가 열린 곳은 훌륭한 전시장이나 극장도 아닌 소련 시절 고무공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공장 폐업 이후 버려져 있던 이 건물을 여러 예술가들이 공동으로 임대하여 다양한 예술 창조활동 장소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들은 이 건물을 '문화공장(kultuuritehas)'이라고 부르고 있다.

탈린 시내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유명 백화점 인근에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보기로 했다. 이런 번화한 곳에 과연 그런 버려진 공장이 있을까 하는 의심이 생겨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려던 순간, 백화점 뒤쪽으로 불쑥 솟아있는 굴뚝이 하나 보였다. 연기를 내뿜지 않는 그 굴뚝은 이미 수 십년간 사용되지 않은 듯 했다. 이런 시내에 저런 굴뚝이 있을 이유는 단 한가지밖에 없었다.

이미 해는 뉘엿뉘엿 지어서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굴뚝을 보고 어렵지 않게 찾아간 문화공장 입구에 들어서자 사이렌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 등 평상시에는 거의 듣지 못하는 괴성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볼륨을 최대한 높여서 소리만 지르고 있는 록밴드, 두 남녀를 매달아 숯불에 굽고 있는 예술가들, 탈출하려는 노예를 생포한 주인인양 소리를 지르는 사람에게 쇠줄을 매달아 끌고다니는 여인, 관속에 들어앉아 피리를 부는 여인 등등.

단지 소음과 이유 없는 몸짓만으로 가득찬 그 행위들을 보면서, 과연 이런 행동을 예술이라고 불러도 될까 하는 심각한 고민에 빠뜨리게 하기 충분했다.

'우리는 예술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문화공장 내에서 벌어진 이상한 추모행사 풍경.
'우리는 예술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문화공장 내에서 벌어진 이상한 추모행사 풍경. ⓒ 서진석
버려진 고무공장이 현대 예술의 중심지로

ⓒ 서진석
기자는 '문화공장'의 공장장을 만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올해 30세의 마디스 미코르는 현재 4년동안 이 문화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원래 예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문화공장 활동은 이미 4년 전에 시작했어요. 이전엔 가구를 개조하는 공장으로 내가 개인용도로 사용하면서 남는 자리를 예술가들에게 조금씩 자리를 내주곤 했는데, 그 소문을 듣고 예술가들이 점점 찾아들기 시작했지요. 우리 문화공장엔 특별한 정치적 성향도 없고 고도의 예술적 수준을 갖추어야 하는 등의 요구사항도 없습니다. 갓 예술을 시작하는 젊은 사람들로서 예술 창조에 종사하는 사람이면 전부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전시나 공연을 할 장소를 찾는데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이곳은 예술가들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되어왔고, 자연스럽게 새로운 예술창조가 시도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문화공장의 활동은 그렇다 치더라도, 저 의미없어 보이는 비명소리와 동작은 대체 새로운 시도의 희생양이 된 이들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기계를 만들다가 희생된 사람들은 당시 전부 당시 미치광이나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곤 했습니다. 인류에게 편안함을 주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희생을 감수하여 만들어진 이 기계들이 역사에 의해 상품이 되거나, 아니면 인간을 죽일 수 있는 장치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은 예술가들에게 재미있는 화두를 던져주지요."

아무나 공장에서 예술을 할 수는 없다

'문화공장'의 공장장 마디스 미코르.
'문화공장'의 공장장 마디스 미코르. ⓒ 서진석
이 답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런 막막한 자리에 처음 서게 된 기자는, 그 알다가도 모를 답변을 받고 또한 한참 고민을 해야했다. 마디스는 이 행사가 단지 예술의 차원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인류사에 대한 고민과 철학을 바탕으로 한 자리라고 덧붙혀 주었다. 예술가들의 세계는 알다가도 모를 곳이다.

과거 폐허가 되었던 고무공장이 어찌 보면 상당히 흉물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깨끗하고 깔끔하게 정돈된 일반적인 전시장이라면 이런 예술이 허락됐을까? 그렇다면 천혜의 조건이다. 그들은 관객들을 향해서 계란을 던질 수도 있고, 습기와 곰팡이로 가득한 벽을 캔버스로 바꿀 수도 있다. 남들은 무관심하게 버릴 수 있는 진흙을 훌륭한 도자기로 빚어내는 것이 예술가들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으로 가능한 일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 흉물스러운 공장에 꽃 피고 있는 예술적 활동은, 새로운 시각과 독특한 세계의 가마에서 구어져 나오는 아름다운 도자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마에서 나올 것이 백자인지 청자인지 아직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사람들은 매일 매일 모여 새로운 시도를 벌이고 있다.

새로운 시도는 역사를 바꿔놓을 만한 잠재력이 있는 것이고, 그런 새로운 시도가 맘껏 펼쳐지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면, 역사는 우리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문화공장은 그들의 시도가 선입견과 편견의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안전한 무대를 제공해주는 자리이다.

이 옛 고무공장 외에도 소련시절 화력발전소 건물 역시 문화공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두 건물은 모두 상태가 아주 형편 없지만, 엄연히 소유주가 따로 있다. 그래서 매달 적지 않는 임대료를 내야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그것은 문화공장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회비로 충당된다.

이미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이런 시도가 수 년전부터 있어왔던 것이고, 그런 조직들간의 연합 조직들도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에스토니아의 문화공장 역시 그 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세계의 독립 예술가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다.

리투아니아 빌뉴스의 우주피스 예술인 마을.(왼쪽) 예술인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위에 리투아니아어로 우주피스 예술의 인큐베이터라고 적혀있다.(오른쪽)
리투아니아 빌뉴스의 우주피스 예술인 마을.(왼쪽) 예술인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위에 리투아니아어로 우주피스 예술의 인큐베이터라고 적혀있다.(오른쪽) ⓒ 서진석
리투아니아 안의 또 다른 나라 우주피스 공화국

에스토니아에 문화공장이 있다면, 이웃나라 리투아니아에는 예술인의 마을이 있다. 수도 빌뉴스 시내에서 강을 하나 건너면 도달하는 우주피스(Uzupis)라는 이 마을은 2차 대전 전에는 유대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곳으로, 전쟁통에 유대인들이 전부 추방되고 마을 자체도 파괴되었다.

그런 이유로 소련 시절 우주피스는 빌뉴스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수도 시설도 변변히 없었던 그곳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던 떠돌이 예술가들이 하나 둘씩 모여 들면서 예술인 마을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 결과 현재는 빌뉴스의 몽마르뜨로 불리면서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우주피스 마을 표지판. 이 표지판이 위치한 다리는 매년 만우절이 되면 우주피스 공화국으로 들어가는 국경으로 변한다.
우주피스 마을 표지판. 이 표지판이 위치한 다리는 매년 만우절이 되면 우주피스 공화국으로 들어가는 국경으로 변한다. ⓒ 서진석
이 마을은 매년 4월 1일 만우절이 되면 독립국으로 변신한다. 우주피스 지역으로 들어오는 다리는 국경으로 변화하고 그곳으로 들어오는 모든 이들은 여권에 입국도장을 받아야한다.

그 날 하루 동안 별도의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통치하는 우주피스 공화국이 되는 것이다. 우주피스 공화국의 대통령은 유명한 시인이나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인 로마스 릴레이키스가 맡고 있다. 달라이 라마가 이 우주피스 공화국의 명예시민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새롭고 별난 사고방식을 가진 예술가들이 아니었으면, 이 곳은 지금쯤 어떻게 변해있을까? 계속 증가하고 있는 인구 탓에 아파트촌이 되었을 수도 있고, 새로운 공업단지가 되었을 수도 있다.

가는 곳마다 같은 모양의 고층빌딩과 자칭 유럽스타일의 호화 아파트들의 줄줄이 이어져 있는 서울 시내보다 먼지가 자욱하고 어두침침한 이 예술인의 마을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단지 나의 착각일 뿐일까?
#오토 릴리엔탈#비행#에스토니아#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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