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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은 어수선한데 집 주변 곳곳에 꽃이 피었습니다. 꽃들이 어수선한 마음을 잡아 당깁니다. 밭일을 하는 내게 쉼표를 찍어 줍니다. 호미를 놓고 물집 잡힌 흙손을 털어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사랑방 뒷문을 열니 매실나무 꽃이 활짝 반깁니다. 매화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매화에 홀딱 빠져 있다가 문득 방문 고리에 시선을 놓습니다. 매화 꽃이 예쁘니 방문고리도 예쁘게 다가옵니다.
밖으로 나오자 대문 없는 대문간 곰순이네 집, 강아지 몇 놈은 어미젖을 빨고 있고 또 몇 놈은 뚤래뚤래거리며 집 주변을 아장아장 쏘다닙니다. 곰순이네 집 바로 아래에는 그 순진무구한 강아지 눈빛 같은 별꽃들이 ‘나 좀 봐라’ 반짝반짝 거립니다.
이제 마악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들이 어미닭 주변을 쫑쫑쫑 맴돌고 있는 볕 좋은 닭장 옆댕이에는 풀꽃들이 지천입니다. 냉이꽃이 피었습니다. 하얀 민들레가 활짝 웃고 있습니다.
오고가는 발 끝에 밟혔던 이름 모를 풀들, 그 풀에서도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참말로 신기한 일입니다. 그 흔하디 흔한 풀꽃에 빠지다 보니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덩달아 신기하게 다가옵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들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감나무, 뽕나무, 대나무, 참나무, 둥구나무, 박태기나무, 배추꽃, 제비꽃, 벌금자리 꽃 또 다른 이름 모를 풀꽃과 나무들. 서로가 서로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내려다 보고 올려다 보고, 같은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나는 흙바닥에 납작 엎드려
시선을 맞춥니다.
그들 또한 나를 봅니다.
가슴으로 파고 듭니다.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두근거리는 '나'를 봅니다.
그런 내 모습이 신기합니다.
웃음이 나옵니다.
풀꽃도 환하게 웃습니다.
언젠가 아는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한 통 걸려왔습니다.
“기가 막힌 꽃이 피었네요, 얼른 와 봐요.”
아는 스님 절에 가보니 정말로 기가 막힌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석등 받침 틈새에서 이름모를 보랏빛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난초처럼 생긴 풀잎에서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횡재라도 한 듯 정신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려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별로 신기할 것도 없었습니다. 본래 모든 생명들이 다 신기한 것인데, 어리석게도 그 꽃 하나에 홀딱 빠져 있었습니다. 순간, 그 모든 꽃들을 등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희소성의 가치 판단으로 생명을 차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절집의 석등 틈새에 피어난 꽃이라 하여 뭔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었습니다. 석등의 꽃이 신비한 현상이라면 발 아래에서 짓밟히고도 피어나는 풀꽃이며 아스팔트 가장자리 틈새에서 솟아나는 풀꽃들이야 말로 더욱 더 신기한 일입니다.
늘상 곁에 있는 내 가족이 소중한 것처럼 평생 보기 힘들다는 우담바라보다는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풀꽃이 내겐 더욱더 소중합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전설의 꽃, 우담바라가 3천 년에 한번씩 피는 꽃이라면 풀꽃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3천년 동안 꽃을 피워 왔고 또한 앞으로 3천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자리로 꽃을 피울 것입니다.
풀꽃에 푹 빠져 있던 나는 다시 호미를 들고 밭에 나가 풀을 뽑습니다. 강아지 눈빛 같은 별꽃을 뽑아내고 냉이꽃도 뽑고 어여쁜 벌금자리꽃도 송두리째 뽑아냅니다.
절집 석등에서 피어난 꽃은 더 이상 피어나지 않았지만 내년 이맘때가 되면 그 풀꽃들은 다시 피어오를 것입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랬듯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