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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동에 그토록 수많은 예술가들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당시 유일한 종합예술공연장이었던 ‘시공관’(구 국립극장)이 명동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 컬처뉴스
도시와 건축은 단지 물리적인 것으로서의 의미를 벗어나 과거와 현재의 기억을 축적하고 미래의 기억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도시와 건축에 관한 이야기는 어쩌면 이 땅에 살아왔던 ‘과거의 우리’가 어떻게 ‘현재의 우리’를 만들어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보고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문예아카데미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우리의 역사, 기억, 생활이 내재되어 있는 도시의 문화유산을 되돌아보고 그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건축강좌 ‘시간의 켜-도시의 문화유산’을 마련했다. 이번 강좌는 지난 3월 30일부터 시작해 매주 금요일 저녁 7시에 진행되며, 총 7개의 강의로 구성되어 있다.

1960년대 중반까지 명동은 한국의 몽마르트

그 첫시간 ‘도시재개발과 문화유산보존의 갈등’(3월 30일)에 이어 두 번째 시간 ‘명동백작-극장’이 지난 2004년 EBS에서 <명동백작>을 연출한 이창용 PD의 진행으로 지난 6일(금) 문예아카데미 강의실에서 열렸다.

이창용 PD는 “박정희 시절,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라는 구호 아래 문인과 예술가, 지식인 등 정신 노동자가 경멸받기 시작하기 전, 1960년대 중반까지의 명동은 그야말로 한국의 몽마르트였다”고 전하며 “<명동백작>은 예술가들을 다루는 문화사의 외양을 두르고 있지만 ‘잃어버린 한국인의 원형’을 찾고자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 한국전쟁 후 명동은 그야말로 폐허였다. 이 거리에 명동을 사랑했던 예술가들이 찾아 오면서 명동은 다시금 예술의 거리로 활기를 되찾게 된다.
ⓒ EBS
그렇다면 명동백작 이봉구(1916~1983년, 소설가)를 기억하는 이는 몇이나 될까. 그는 196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당시 ‘예술의 메카’였던 명동을 아우르며 수많은 예술가와 교류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가 생전에 출간한 다섯 권의 창작집 중 세 권의 책제목에 ‘명동’이 들어갈 정도로 그에게 있어 명동은 창작의 본거지이자, 영원한 예술공간으로의 노스탤지어였다.

사소설에 가까운 그의 저서 <명동백작>이 EBS에서 같은 제목으로 극화된다고 했을 때, 적잖은 사람들이 환호했다. 당시 예술인들의 세태를 조망해 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산업화와 함께 과밀화되면서 지워진 명동의 옛 모습, 낭만이 가득했던 그 예술의 공간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이창용 PD는 “지금은 유행의 메카이자 패션의 거리로 변해버린 명동에서 옛 모습을 찾기란 하늘에 별찾기”라면서 “그 이전, 한국전쟁 후 상실의 거리가 다시금 예술의 거리로 변모할 수 있었던 당시 명동의 공간들을 짚어보겠다”며 강의를 시작했다.

문인들이 명동 다방을 기웃거렸던 까닭은?

서정주 시인, 김수영 시인, 박인환 시인, 전혜린 수필가, 송범 무용가, 김백봉 무용가, 임만섭 성악가, 김동원 연극배우, 임춘앵 국극배우, 이중섭 화가 등 당시 명동을 제집 드나들 듯 했던 예술가의 이름만 살펴보아도 당시 명동이 어떤 의미의 공간이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명동에 그토록 수많은 예술가들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당시 유일한 종합예술공연장이었던 ‘시공관’(구 국립극장)이 명동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봉구가 “우리나라 문화가 다 들어가 있다”고 말한 ‘시공관’은 1934년 ‘명치좌’라는 이름의 영화관으로 문을 연 뒤, 1948년 ‘시공관’으로 명칭을 변경, 1957년부터 1973년까지 국립극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 문예싸롱
ⓒ EBS
특히나 문인들이 명동에 모여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다방’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다방’이라는 공간이 물론 차를 마시면서, 시도 쓰고, 잡담도 나눌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지만, 당시 신문에 글을 게재하는 것이 생계수단이었던 문인들이 신문사의 편집국장을 우연히라도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예술인들의 아지트로 유명했던 ‘다방’으로는 ‘모나리자’ ‘문예싸롱’ ‘동방싸롱’ ‘청동다방’ ‘돌체’ 등을 꼽을 수 있다. 먼저 ‘모나리자’는 전쟁의 상흔으로 폐허가 된 명동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다방으로 장르를 막론하고 명동의 많은 문화인들이 출입하던 곳이다.

때문에 문인들이 출입하던 ‘문예싸롱’과 대립하며 ‘모나리자파’를 형성하기도 했으며, 후에 ‘모나리자’가 없어지자 출입하던 문화인들은 새로 생긴 ‘동방싸롱’으로 아지트를 바꿔 ‘동방싸롱파’를 형성하기도 했다.

‘문예싸롱’에는 당시 황순원,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 등 기성 문단을 주름잡고 있었던 문인들이 출입하던 다방으로 문단추천, 원고청탁 및 사교, 문단논쟁, 연애, 싸움질이 벌어졌던 한국문단비사가 수두룩하게 전해진다. 또 지금까지 명동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당시 건물 중 하나인 ‘동방싸롱’은 1층 다방, 2층 집필실, 3층 회의실로 구성된 종합문화회관이었다.

대폿집 '경상도집'과 나애심의 '세월이 가면'

이창용 PD가 “<명동백작>은 다방 열전, 국밥집 열전, 선술집 열전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대부분의 신이 다방 신과 선술집 신이었다”고 전하기도 할 만큼 명동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선술집’이다.

그 중에서도 동방싸롱 앞에 자리했던 대폿집 ‘경상도집’은 나애심이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세월이 가면'이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댄디보이였던 박인환 시인이 즉흥적으로 시를 짓고, 그 시에 이진섭 작곡가가 음을 단 노래를 나애심이 즉석에서 부른 것이다. 일주일 후 박인환 시인이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해 당시 명동 거리 전체에 이 노래가 울려퍼졌다고 한다.

▲ 포엠
ⓒ EBS
이밖에도 탤런트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했던 주점인 ‘은성’, 위스키 시음장으로 문을 연 뒤 값싼 양주를 공급해 명동 예술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포엠’, 음악광들의 아지트였던 ‘돌체’, 박인환이 운영했던 ‘마리서사 서점’ 등 명동에는 수많은 예술인들의 아지트들이 곳곳에 존재했었다.

이창용 PD는 “1973년 장충동 국립극장이 생기면서 시공관이 기능을 상실하고, 1960년대 개발 붐으로 명동 역시 땅값이 치솟고 금융권이 들어오면서 당시의 다방과 선술집 등이 유지를 하지 못해 명동을 떠났으며, 명동을 주름잡았던 터줏대감 오상순과 박인환, 전혜린 등이 세상을 떠나 명동의 그 흡입력이 사라져 버렸다”고 아쉬워 했다.

더불어 “첨단건물을 짓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우리 고유의 문화가 살아있는 건축물을 보존하고 활용해야지만 우리의 도시가 훨씬 아름다워 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강좌는 ‘기억은 남고 철마는 달린다-간이역’, ‘목포의 눈물-목포 중앙교회’, ‘추억을 밝히는 불빛-청계천 조명’, ‘시간속의 순환버스-미술관’, ‘이 골목이 아름답다-홍대 앞 골목길’이 이어질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컬처뉴스>(http://www.culturenews.net)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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