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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번 주에는 꼭 와야 해. 꽃이 다 지게 생겼어."
언제나 벚꽃이 피면, 엄마한테 징징댔다. 군산은 4월이면 벚꽃을 보기 위해 관광버스가 사람들을 태우고 오는 도시다. 내가 군산에서 산 지 10년도 넘었는데 엄마는 전군도로나 월명 공원에 핀 벚꽃을 보신 적 없다. 꽃놀이 다닐 만큼 여유 있는 일을 하신 적이 없다.
엄마가 올 봄에는 꼭 꽃을 보러 오겠다고 하셨다. 나는 2주 전부터 날마다 월명 공원에 가서 벚꽃 나무들을 들여다 봤다. 지난주 지역 신문에는 군산 은파 유원지에 벚꽃이 피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월명 공원은 평지보다 높아서 늦게 피긴 한다. 그래도 행여 우리 엄마 오시기 전에 꽃이 필까봐 조바심이 났다.
밤마다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그런데 엄마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아프셨다. 무조건 쉬어야 할 텐데 엄마는 굴비를 엮는 일터 말고도, 따로 새벽이나 밤에 '알바'로 굴비 엮기를 하고 계셨다. 날마다 일을 그렇게 몰아쳐서 해대니 몸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으셨다. 금요일 밤, 엄마가 군산에 올 수 없는 건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다.
"조여사, 내가 데릴러 갈까?"
"아퍼야. 토요일에는 일 갔다가 일요일에는 목욕탕 갔다 와서 쉬어야 쓰겄씨야."
"꽃도 피었는데... 내일 제규 학교 끝나면 내가 영광 갈게."
"일하러 가야 하는디야?"
"몰라! 집 열쇠 어따 놓을 거야?"
올 3월부터 '진짜' 프리랜서가 된 조여사
다음 날 오전이었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출발 안 했제? 엄마 오늘 일 안 갔씨야. 새끼들이 온다고 하는디 밥이라도 해 놓고 기다려야제. 조심해서 온나이."
엄마 집에 도착하기 30분 전이면 "엄마, 밥!"이라고 전화를 건다. 5분쯤 남겨두고는 다시 전화한다. 그러면 대문 앞에 엄마 아빠가 모자란 사람처럼 웃고 계신다. 방에는 밥상이 차려져 있다. 동생과 나는 잘 보일 사람이 없어서 '깨작깨작' 먹는다. 엄마 아빠는 우리 숟가락 위에 반찬을 놓으신다. 누구를 닮아서인지, 푹푹 떠먹지 않는 아이 숟가락에, 나는 반찬을 놓고 있다.
엄마 집 대문 앞에 차를 세웠지만 엄마는 나와 계시지 않았다. 나는 차에서 들고 갈 것도 많은데 "엄마! 엄마!" 부르면서 집으로 달려 들어갔다. 동생 지현이랑 아이가 어떻게 오는지도 신경 안 썼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엄마 조여사 모습에 울컥했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조남기씨가 생전에 암 투병하던 때처럼 퀭하셨다.
엄마가 일터에 가지 않자 엄마 몸은 맘 놓고 아파버린 모양이었다. 식은땀이 흐르고, 기침도 멎지 않았다고 하셨다. 엄마는 며칠 동안 몸살감기를 앓으면서 일하느라 제대로 씻지 못하셨다. 이녁한테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목욕탕에 다녀오셨다. 겨우겨우 돌아와서 집을 쓸고 닦으려던 찰나에 우리가 온 거였다.
"조여사! 굴비 엮는 사람이 된 게 천하를 다 얻은 것 같다고 하더만 감기를 얻었소?"
"아따, 죽을 뻔 했씨야. 내 생전에 첨으로 입맛이 써서 밥을 못 먹었씨야."
"그럼 쉬어야지."
"내 편의만 봐 주라고 하믄 쓴디야? 글고 놈의 집 일 하러 가서 아프다고 하면 되가니?"
엄마는 올 3월부터 '진짜' 프리랜서가 되셨다. 그 전에 일하던 곳에서는 굴비를 엮는 일 말고도 '염장질, 세척, 엮거리, 선별, 센치작업'까지 하셨다. 일도 늦게 끝나는데 하루에 3만 5천원을 받으셨다. 지금은 오전 8시에 출근해서 굴비를 엮는 일만 하고 오후 5시쯤 퇴근하신다. 그렇게 해서 하루 5만원, 일요일에는 쉬신다. 그런데 일요일에 전화를 해 보면 아빠만 혼자 계셨다.
"아빠, 조여사는?"
"알바 갔제."
규모가 큰 굴비 가게에서는 엄마 같은 전문적인 프리랜서들을 고용해서 쓰지만 조그마한 굴비가게들은 형편이 안 된다. 그러니까 굴비 엮는 이들의 정상 근무 시간인 오전 8시에서 오후 5시를 비껴서 쓸 수밖에 없다. 엄마도 새벽 3시나 4시부터 '알바'를 하셨다. 엄마가 몸이 아프다고 쉬어버리면 소규모 굴비 가게들은 제 때 납품을 하지 못한다.
난 척 하고 살지만 나도 엄마 닮았다
장정 같던 엄마는 앓으면서도 이녁이 굴비 엮는 사람이 됐다는 게 신기했다고 하셨다. 엄마는 '알바'로 굴비를 엮으면 한 두름에 300원을 받는다. 1시간에 보통 30두름을 엮으니까 시간당 9천원을 받는데 그 돈이 오지게 기쁘다고 하셨다. 나는 엄마가 '붓으로 먹게 살게' 가르쳐 놔서 엄마보다 대여섯 배쯤 번다. 그래도 밥벌이 하는 게 괴로울 때가 많다.
"조여사, 돈 벌어갖고 뭐 할라요?"
"땅 달린 집을 사야제라우. 꽃나무도 심고, 채전거리를 심어야제라우. 내 새끼들, 내 막둥이 동생들, 느그 광환이 삼촌까지 양껏 김치를 담어 줄란디?"
한때 엄마는 자식들이 이녁을 부끄러워할까봐 저어하셨다. 동생 지현이가 원자력 발전소에 다닐 때 엄마는 일용직 잡부셨다. 15년 전이어서 엄마 나이가 40대 초중반이었겠다. 그 때 엄마는 회사 제복을 입은 지현이가 커피 마시러 가는 길, 밥 먹으러 가는 길을 피해 다니셨다. 먼발치에서만 보고서는 집에 와서야 "오늘 내 시째(동생 지현의 어릴 때 이름) 봤네이" 하셨다.
나는 학교 다닐 적에 길에서 엄마를 마주치면, 엄마 짐도 들고, 엄마 곁에 바짝 붙어 섰다. 그런데 혼인해서 아기를 낳고난 뒤에 엄마를 미워한 적 있다. 남 때문에 집을 잃고도, 말도 안 되는 보증을 서 주는 엄마가 무서웠다. 엄마가 군산에 온다고 하시면 일 때문에 바쁘다고만 했다. 되돌아보면, 서른 살 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참으로 '쪽 팔리는' 행동이었다.
나는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많이 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써 보거나 만져보지도 않은 돈을, 백만원이나 천만원하고는 규모가 다른 돈을, 벌써 몇 년째 갚고 있다. 그러고도 "사흘만 쓰고 갚을게"라고 말하는 선배한테 낚여서 못 받는 돈도 있다. 잘난 척 하고 살지만 나도 엄마 닮았다.
덧붙이는 글 | 4월 7일과 8일에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