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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뉴스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최영분(왼쪽)씨와 오빠 최명철씨.
위드뉴스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최영분(왼쪽)씨와 오빠 최명철씨. ⓒ 위드뉴스
- 최인화씨는 현재 어떤 상태입니까?
"아버지는 현재 수원구치소에 구속 수감중이에요. 시각장애인은 의료용 침술 행위를 할 수 없다는 게 죄목이지요. 마을 할머니들 말로는 동네 주민 중 한 분이 검찰청에 투서했다고 하더라고요."

- 조선시대 때부터 시각장애인은 안마와 점치는 일, 침술 행위를 하지 않았습니까. 전 세계적으로도 침구사 제도가 보편적인데?
"그렇긴 한데 아버지 말로는 1960년대 이후 한의사제도가 생기면서 침구사제도가 폐지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검찰에선 시각장애인이 침을 놓고 이익을 얻으면 불법이라고 하고요. 그런데 시각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안마와 침 놓는 것 빼고 할 수 있는 일이 이 사회에는 없잖아요.

게다가 이번에 구속된 사유가 이익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맹세코 아버지는 이익을 얻고자 침을 놓은 것이 아니었어요. 같은 일로 4번이나 구속이 되었고, 2번이나 실형을 살았던 분이 무엇 때문에 이익을 얻으려 했겠어요. 자식들도 장성해서 저(최영분) 같은 경우 아버지를 모시려고 남편의 허락을 얻어 이번에 친정에 들어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런 일이 생기니…."

- 최인화씨는 언제부터 침술을 익혔습니까?
"아버지는 7살 때 장티푸스에 걸렸는데 그때 약을 잘못 써 시력을 완전히 상실했어요. 그러던 차 11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스님에게서 몇 년 침을 배웠다고 해요. 침을 배우면서 낮에는 동생의 손을 붙잡고 길거리로 나가 껌이나 불펜을 팔며 동생들을 먹여 살렸고요. 저희 조부모가 일찍 돌아가셨거든요.

초등학교 입학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해요. 이렇게 사시다가 서울의 사당동 판잣집에 이사를 와서 17살 때 전문 침술학원에서 2년간 공부를 하셨고요. 이때는 시각장애인도 합법적으로 침을 놓을 수 있었어요. 침구사 제도가 폐지될 때 아버진 정부관계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데요. '장님이 무슨 침을 놓냐? 앞으로 침을 놓지 마라.'

하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아버지가 달리 할 수 있었던 일은 침술밖에 없었다고 하네요. 나중엔 안마라도 해볼까 생각해보았지만 학력이 없으니 그조차 안 되었고, 개를 키워 파는 일도 해보려 했지만 사기만 당하고 말았어요. 자판기 사업에 손대었다가 그것마저 사기당했고요.

28살 때 어머니(시각장애 1급)와 결혼하셔서 2남 3녀를 낳고, 일찍 돌아가신 작은아버지의 자제까지 합쳐 모두 15명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아버지는 불법을 감수해야했어요. 밖에 나가 동냥질하여 버는 수입으론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으니까요.

외국에선 침구사 제도가 있어 거기서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오기도 했어요. 점자로 된 동의보감 등 침술 관련 점자책을 읽으며 필리핀·태국·중국 등에서 공부하고 자격증을 취득했지요."

"아내와 자식들, 조카들까지 15명 가족 생계 책임져"

- 15명이라니 그저 놀랍습니다. 시각장애 1급이라면 오히려 조력을 받아야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버지가 살던 어린 시절이나, 우리가 살던 어린 시절엔 정부 보조가 전혀 없었어요. 있었다면 동사무소에서 몇 달마다 한 번씩 나오던 밀가루, 정부미, 라면이 전부였고요. 지금도 아버진 수급권자가 아니지요. 자식이 있으니까요. 가난함이 항상 따라다녔어요.

그럴수록 아버지는 악착같이 사셨어요. 자식들이 장애인의 자식이라고 놀림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거든요. 집도 없어 오랫동안 남의 집 살이를 해서 집이라도 한 칸 사는 게 꿈이었고요. 자식에게 집 없는 설움을 주고 싶지 않았던 거지요. 그래서 5천원 벌면 500원만 쓰고, 나머지는 반드시 저축하며 살았어요."

-60년대 이후 여러 번 구속 경험이 있다지만, 공갈이나 협박도 많이 받았을 법한데?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아버지는 침을 잘 놓는 걸로 유명했어요. 소문만 듣고 오는 사람도 많았고, 동네 주민들 또한 아버지에게서 침을 맞았지요.

제(최영분)가 어릴 적 일이었어요. 다리를 다친 동네 아주머니가 아버지에게서 침을 맞곤 다시 다리를 절며 찾아왔어요. 치료가 안 되었으니 경찰에 고발하겠다는 거지요. 아주머니는 그때 시가로 집을 한 칸 살 수 있는 돈을 요구했어요. 당신이 구속되면 가족들이 거지가 될 게 두려웠던 아버지는 여기저기 돈을 빌려서 주었지요.

그런데 마침 있은 학교 운동회에서 그 아주머니가 신나게 막 달리고 있는 거예요. 너무 화가 나서 '아줌마 이러면 안 되죠'라고 항의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 아줌마는 자기 행동이 창피했던지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어요."

-구속되기 전에 최인화씨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평택에 있는 안마사 밑에서 일을 했어요. 매일 아침 8시 30분에 집을 나가서 밤 10시가 넘어야 집에 돌아오셨지요. 고령의 나이에 온종일 일했는데도 월급은 겨우 70만원에 불과했어요.

저희가 일을 하지 말고 집에서 쉬시라고 권유해도 아버지는 '벌어야 살지 않느냐?'며 계속 일을 하시다가 결국 6개월 만에 그만두게 되었어요. 마음과는 달리 너무 힘들고 지친 거지요."

"경찰에 안 끌려가려고 저항해 가족이 설득"

- 고령에 중증 장애까지 있는데 검찰에서 구속 수사를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동종 전과가 있고, 실형도 살았기 때문에 도주의 위험이 있다고 구속시킨 것이었어요. 하지만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전에 받은 실형에 대해 검찰 관계자조차 그러더군요. '중증 장애인이 먹고 살려고 한 일인데 1년 5개월이나 살게 했던 건 너무했다'고. 왜 사람을 죽여도 그만한 이유가 있으면 집행유예를 받지 않나요.

아버지는 실형을 사는 것에 대한 큰 두려움을 안고 평생을 사신 분이에요. 교도소에선 시각장애인이라고 밥에 침을 뱉거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공연히 시비를 걸어 때린 일이 잦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경찰이 집에 찾아온 날에도 아버지는 '경찰이 날 또 감옥에 넣으려고 왔다'며 완강히 저항하셨어요. 나중엔 경찰이 8명이나 와서는 강제로 끌고 가려고 했고요. 그래서 가족들이 나서서 아버지를 눈물로 설득했어요. '우리와 함께 경찰서로 가자'고. 아버지가 짐짝처럼 끌려가는 건 원치 않았거든요."

- 구속되기 전에는 어떤 수사가 있었나요?
"검찰에선 아버지가 돈을 받고 침술 행위를 했다고 확신하고 있더라고요. 선례가 있으니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한 거지요.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달라요. 아버지는 평소 마음 씀씀이가 넓어 아프다고 찾아오는 환자를 차갑게 돌려보내질 못해요. 그래서 돈을 받지 않고 침만 놔주겠다고 했던 거지요.

그런데 한국 사람은 누가 자기를 도와주면 아무리 공짜라고 해도 담뱃값으로 하라며 몇 천원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가는 게 미풍양속이라고 생각하잖아요. 하물며 일당 주며 집수리를 부탁해도 담뱃값은 별도로 줘야 하는 것처럼. 검찰에선 그걸 이익을 취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어요.

검찰에서 오라고 불러 아버지랑 제가 같이 갔는데, 이런 속사정을 말하며 의료용 침술 행위를 한 게 아니라고 했는데도, 검찰측에선 '당신이 이렇게 나오면 실형을 살리겠다'고 말해 아버지가 굉장히 겁을 집어먹었어요. 그래서 '내가 영업을 했다'는 식으로 조서를 다시 썼지요. 교도소에 가지 않으려고요."

- 구속된 후 최인화씨에게 어떤 건강상의 변화가 없었습니까?
"3월 12일 경찰에서 전화가 왔어요. 경찰서 유치장에서 쇼크를 받고 쓰러져 병원 응급실로 이송 중이라고 하더군요. 황급히 병원에 찾아가보았어요. 아버지는 의식을 잃고 몸이 마비된 상태였고, 침대에 수갑으로 묶여져 있더라고요. 경찰 세 명이 있었는데 마치 동물을 쳐다보는 것 같았어요.

수갑이라도 풀어달라고 애원해서 수갑은 풀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실 것만 같아서 가족들 모두 마음이 아팠지요. 어머니도 충격을 받고 '살기 싫다'고 말씀하시고."

- 지병이 있었나 봅니다.
"고혈압이 있었고, 20대 적 사고로 허리를 크게 다친 이후로 지금도 바닥이 부드럽지 않으면 잠을 잘 못 주무세요.

허리를 다친 이유를 물어보니, 당시 직장이 멀리 떨어져 있어 기차를 타고 다녔는데 어떤 비장애인이 '더럽다'면서 기차가 달리는데 발로 차서 밖으로 나뒹굴었다고 하던데…(울음) 하지만 너무 가난해서 치료도 받지 못하고 그대로 두어 나이가 들수록 더 아픈 것 같아요."

- 수사 과정에서 장애인 차별 행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는 무식해서 어떤 게 잘못인지 잘 몰라요. 하지만 구속시키는 과정에서 보호자 없이 시각장애를 가진 연로한 노인을 혼자 유치장에 가둬 충격을 받게 하고, 심각한 상태에서 병원에 갔는데도 침대에 수갑을 채워놓는 것 같은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네요."

- 가족들 중에서 특히 손자, 손녀들이 더 많은 충격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제 큰 딸이 초등학교 6학년인데, 할아버지와 경찰이 실랑이 벌이는 걸 다 봤어요. 할아버지가 경찰들과 함께 집밖을 나설 때 주저앉아 엉엉 울더라고요. '할아버지는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다. 잡아가지 말라'고 소리치면서요. (울음)

딸의 소원이 판·검사가 되는 거였어요. 할아버지처럼 어려운 사람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며. 그런데 할아버지가 구속된 뒤에는 그 소원을 버렸어요. 엄마한테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검사 아저씨들도 어릴 적에는 나처럼 생각했을 텐데 나도 저렇게 변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해요."

"죽기 전에 눈 한번 뜨는 게 소원"

- 최인화씨의 꿈은 집을 사는 것이라고 아까 말했지만, 오랫동안 고생하셔서 지금은 집을 샀으니 이제 남은 소원이 또 있을까요?
"단 한 번이라도 눈을 뜨는 것이었어요. '내 손으로 키운 자식들 얼굴 한 번 못 보고 살았지만, 손자 손녀들마저 볼 수 없으니 원통하다.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눈을 뜨고 볼 수만 있었으면 좋겠다'며 한숨을 내쉬었으니까요.

손으로 얼굴을 만져보기는 하지만, 직접 얼굴을 보는 것과 다르겠지요. 비장애인 할아버지처럼 손자들 커가는 걸 바라보고 싶은 마음인데요."

- 곧 재판이 있을 건데 앞으로 가족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집을 팔아서라도 아버지 형량을 낮추려고 변호사를 선임했어요. 얼마 전 있은 69세 생일도 구치소에서 혼자 보냈으니, 자식으로서 크게 불효하는 것 같고요. 어떤 사람들은 말해요. '구걸해서 아이들 키울 것이지 왜 침술 행위를 했냐?'고.

하지만 저희들은 아버지에게 크게 감사드려요. 자기를 희생하면서 어머니와 자식들 생계를 뒷바라지했으니까요. 아버지는 시각장애인의 자식으로 저희가 살아가는 것에 미안해했기에, 거지 새끼로 저희가 살아가는 걸 원치 않았던 거예요.

일부러 아버지의 재판을 2주 미뤄두었어요. 그동안 탄원서를 받아보려고요. 그러나 정치와 무관하게 살다 보니 알고 지내는 유명한 사람이나, 인권단체도 모르다 보니 동네 교회조차 찾아갈 엄두를 못 냈어요.

절박한 저희의 심정을 이해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위해 선처를 바란다는 탄원서를 써줄 분이 어디 없나요? 제발, 꼭 부탁드립니다."

시각장애인은 한국 장애인의 1/3을 차지한다. 그러나 2/3는 재가 장애인 생활을 하며 지낸다. 일자리가 없기 때문. 국내 전체 직업 5만여개 중 시각장애인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딱 3가지. 안마, 비의료용 침술(수지침), 구걸이 그것이다. 대학을 나와 석사, 박사 과정을 밟아도 결국 안마사를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최인화씨는 초등학교를 나오질 못해 중졸 이상의 자격을 가진 자에 한해 공인된 맹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구걸과 침술밖에 없었고, 인간적 존엄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불법인 줄 알면서도 침술을 선택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몇 년 전부터 침구사 제도가 부활 움직임을 보였으며, 이는 피할 수 없는 세계적 흐름으로 본 의원을 중심으로 국회에서도 활기차게 논의되고 있는 중이다. 최영분씨는 이 점을 감안한 공정한 재판과 선처가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탄원서와 관련된 문의는 011-203-8483, 최영분

*이 기사는 <위드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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