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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
한미FTA, 스타벅스, 코카콜라, 맥도날드, 할리우드 영화, MS 윈도우…. 이 단어들의 공통점이 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것이다. 소위 '미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이름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감정을 갖고 있을까? 아마도 일부는 우호적인 감정을, 일부는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겠지만 대체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양가감정, 즉 "애증의 교차"가 아닐까?

그럼 혹시 우리가 이들에 대해 애정과 증오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이유가 뭔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아니, 우리가 느끼는 증오심의 근원이 무언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아마 곰곰이 따져 봐도 그 이유가 선뜻 떠오르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미국과 미국을 상징하는 기호들에 대해 증오의 감정을 느끼는 이유 중엔 뿌리 깊은 반서양주의, 즉 "옥시덴탈리즘"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옥시덴탈리즘이란 "오리엔탈리즘"의 반대 개념으로서 주로 서구 사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나 맹목적 증오심, 고정관념 등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가 미국에 대해 느끼는 증오심, 적대감이 전적으로 근거 없고 맹목적인 옥시덴탈리즘에 불과할 리는 없다. 오늘날 전세계에 만연한 반미감정은 미국의 자업자득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반미감정의 밑바닥에 옥시덴탈리즘이 깔려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옥시덴탈리즘의 역사적 기원

그렇다면 도대체 옥시덴탈리즘은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이 책의 저자 이언 바루마와 아비샤이 마갤릿에 의하면 그와 같은 옥시덴탈리즘(반서양주의)이 처음 시작된 곳은 놀랍게도 제3세계가 아닌 유럽이라고 한다.

"서양의 적대자들이 서양을 비(非)인간적이라고 묘사하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옥시덴탈리즘'이라 부른다.‥‥‥실제로 우리가 주장하고 싶은 내용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옥시덴탈리즘은 자본주의,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다른 근대적인 여러 주의(主義)와 마찬가지로, 유럽에서 먼저 발생하여 나중에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다는 점이다.‥‥‥옥시덴탈리즘이란 어떻게 보면 프랑스에서 타이티로 수출된 총천연색 옷감과도 견줄 수 있다. 곧 타이티에 수입된 이 옷감은 원주민의 의복이 되었는데, 고갱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이것을 적도 지대의 이국풍이 전형적으로 드러난 사례로 묘사한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오늘날 우리는 "이슬람교"와 "중동"을 반서양주의의 대명사처럼 인식하고 있지만 불과 1세기 전만 해도 그 자리에는 일본, 독일, 터키, 러시아 등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선 토인비가 말한 "도전과 응전"이 생각나기도 하는데, 결국 자국의 이해관계나 노선에 장애가 되는 나라들이 주로 옥시덴탈리즘(반서양주의)의 대상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일본의 반서양주의는 주로 반미주의를 의미했고, 독일은 미국·영국·프랑스를 상대로, 러시아는 독일을 상대로 반서양주의를 키워 나갔다.

뿐만 아니라 옥시덴탈리즘은 반서양주의나 반미주의를 넘어서 근대, 근대화, 도시, 자본주의, 상업주의, 무신론자, 부르주아지 등에 대한 적대감, 반감을 의미하기도 했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도시와 자본주의를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농촌과 공산주의를 이상향으로 보았고, 영웅을 숭상하는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은 영국과 프랑스의 상업주의를 경멸했다. 킬링필드로 잘 알려진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가 공격 목표로 삼았던 것도 서구화·상업화의 상징인 대도시였다.

2001년 미국의 심장부를 강타한 9·11 테러 역시 옥시덴탈리즘의 역사적 기원과 맥이 닿아 있다. 이 책에 의하면 9·11 테러를 자행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세계 무역 센터, 나아가 미국은 바로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의 연장선이었다. 굳이 바벨탑이 아니더라도 타락한 대도시,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에 대한 심판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얘기다.

이처럼 옥시덴탈리즘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다양하고 복잡하다. 때론 그 안에 바벨탑·소돔·고모라의 이미지가 어른거리기도 하고, 때론 세계대전이나 9·11 테러 같은 극단적인 폭력의 그림자로 얼룩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최근에 일어났던 9·11 테러에서부터 1세기 전 독일, 일본 등에 만연했던 반서양주의와 반미주의, 또한 터키·러시아·중국·중동·그 외에 수많은 제3세계 국가들의 서구 사회에 대한 뿌리 깊은 애증관계, 넓게 보면 바벨탑·소돔·고모라의 역사에까지 맥이 닿아 있다.

따라서 옥시덴탈리즘의 역사적 기원, 세계사에 미치는 영향, 앞으로의 과제 등을 학문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해야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옥시덴탈리즘이 단순한 편견이나 고정관념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만약 이것이 단지 혐오 혹은 편견의 문제라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편견이란 인간 조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자를 열등하게 생각하는 사상이 혁명적인 힘을 얻게 되면 그것은 인류의 파멸로 이어진다." - 본문 중에서

옥시덴탈리즘의 또 다른 얼굴, 근대화

이 책의 저자들이 얘기한 것처럼 타자를 열등하게 생각하는 사상이 혁명적 힘을 얻게 되면 그것은 인류의 파멸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것은 옥시덴탈리즘 뿐만 아니라 오리엔탈리즘, 인종주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멸시와 차별,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 등도 마찬가지다.

결국 옥시덴탈리즘의 문제는 "타자를 열등하게 보는 사상이나 시각"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고정관념이나 편견으로 이어지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지만, 더 나아가 인류의 파멸로 이어질 수 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옥시덴탈리즘, 오리엔탈리즘, 인종주의 등과 같이 타자를 열등하게 보는 모든 사상과 시각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옥시덴탈리즘은 근대화, 서구화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그것은 반서양주의를 표방했던 독일, 일본, 러시아, 터키, 중국 등을 봐도 알 수 있다. 이들 나라들은 모두 표면적으로 반서양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비난하던 서구 사회를 답습하고 모방하는 데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가까이 있는 일본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지금 아랍 사회에 만연한 반서양주의를 아랍 사회의 근대화 과정의 일부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반서양주의를 표방했던 많은 나라들이 끝내 홀로코스트, 군국주의, 전쟁 등의 파국으로 치달았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되겠다.

이언 바루마와 아비샤이 마갤릿이 이 책을 쓴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위와 같은 파국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서구에 대한 왜곡된 '편견'인 옥시덴탈리즘에 지나치게 경도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책을 읽다 보면 이 책의 저자들 역시 서구의 시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느낌도 들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충분히 귀담아 들어볼 만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이언 바루마, 아비샤이 마갤릿 <옥시덴탈리즘>, 민음사, 2007, 송충기 옮김. 188쪽.
가격 12,000원.


옥시덴탈리즘 - 반서양주의의 기원을 찾아서

이안 부루마 외 지음, 송충기 옮김, 민음사(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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