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29일 오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보복폭행과 관련한 조사를 받기 위해 남대문경찰서에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김승연 회장의 평소 성격이나 행동으로 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이 터진 뒤, 재계의 한 인사가 보인 반응이다. '항상 불안한 화약고 같았는데 결국 터졌다'는 것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2년여 전 직접 겪은 일화를 털어놨다. 서울 시내의 한 유명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욕설이 터져 나와 돌아보니, 김 회장이었다고 한다.

두 여성과 함께 있던 김 회장은 이미 술에 많이 취해 있었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레스토랑 사장에게 "집어치워 XX야"라며 크게 화를 냈다. 식당 규모가 크지 않고 별도의 방이 없어 큰 홀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던 터라 모든 손님들이 이 소동을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함께 갔던 손님이 '김 회장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말해 더 놀랐다"고 덧붙였다.

"김 회장 성격으로 볼 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김 회장의 '돌출행동'은 재벌총수들 모임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4년 전 한 그룹 회장의 초청으로 전경련 회장단이 재계의 화합과 친목을 다지는 취지로 골프모임을 열었을 때다.

골프를 마치고 모두 예정된 저녁 만찬장으로 이동하는데, 김 회장은 혼자서라도 몇 홀을 더 쳐야겠다며 '나 홀로 골프'를 고집했다. 김 회장은 주변의 만류에도 막무가내였고, 결국 혼자서 몇 홀을 더 돌다가 주최 쪽의 거듭된 만류로 뒤늦게 만찬장에 합류했다.

당시 행사에 참석했던 한 재계인사는 "주요 그룹 회장들이 전경련 회장단회의에 잘 나오지 않아 어렵사리 만든 행사여서 김 회장의 돌출행동이 더욱 신경 쓰였다"면서 "김 회장은 만찬에서도 자신보다 연배가 많은 다른 그룹 총수들이 안중에도 없는 듯 행동했다"고 말했다.

김승연 회장이 한화그룹 회장이 된 것은 1981년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9살이었다. 아버지인 김종희 한화그룹 회장(창업주)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예상을 훨씬 앞질러 총수직에 올랐다.

'최연소 재벌총수 탄생'이라는 찬탄의 이면에는 "젊은 나이에 그룹 수성이 가능하겠느냐"는 회의적 시선도 적지 않았다. 그가 지난 26년 동안 고독한 최고경영자로서 겪었을 부담과 고통은 일반인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수준이었을 것이다. 재계에서는 그의 특이한 성격과 돌출행동을 이런 이력과 연결 짓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재계의 한 인사는 "운이 좋아 재벌가의 후계자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족한 게 없고 원하는 건 다할 수 있었겠지만, 인격수양은 본인 스스로 책임져야 할 부분인데 제대로 안된 것 같다"며, 처지가 이해는 되지만 변명은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 지난 2005년 6월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전경련 회장단 모임에서 이해찬 국무총리와 전경련 회장단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조폭을 꺾고 법을 넘어서, '황제'가 있었다

김승연 회장의 잘못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그의 일탈행위를 잉태시킨 한국 사회와 기업의 구조적 후진성을 간과하는 것은 동전의 한 면만 보는 것이다.

재벌총수들은 해당 기업 안에서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른다. 그가 말하는 것은 곧 지상명령이고 법이다. 누구도 거역을 못한다. 때로는 그것이 조폭과 같은 행동이고, 심지어 불법이라도. 재벌총수들의 이런 경영행태를 '황제경영'에 비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는 재벌총수들은 특유의 권위의식, 즉 특권의식으로 이어진다. 김 회장의 일탈행위엔 "감히 어떤 X이 (내 아들에게)…"라는 '황제의 특권의식'이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세계적 기업인 미국의 GE나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최고경영자가 김승연 회장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김 회장 또 다른 일화는 재벌총수의 특권의식을 잘 보여준다.

김 회장이 그룹경영을 맡은 지 몇 년 안 돼 사장단 회의를 주재하는데, 그룹의 한 원로가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원래 전문경영인들은 '오너'라고 불리는 총수 앞에서는 행동을 조심한다. 심지어 재벌회장 주재 회의 중에는 생리현상이 급해도 참을 정도다.

하지만 그 원로인사는 연배가 김 회장의 선친뻘이고 정부의 고위직까지 역임한데다, 무엇보다 담배를 좋아해 그런 것으로 여겨지는데, 김 회장은 "감히 내 앞에서 …"라며 대단히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 김 회장이 주재하는 사장단 회의장에서는 재떨이가 사라졌고, 그 원로도 얼마 안 돼 한화를 떠났다.

김승연 회장만이 아니다

재벌은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이다. 외환위기 이후 질적·양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이제는 글로벌시장에서 세계적인 기업들과 당당히 경쟁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화려하고 밝은 이면에서는 아직 전근대적이고 후진적인 기업지배구조와 경영행태의 잔재가 남아 있다.

전문경영인 출신인 그룹의 최고 경영자들이 총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거나, 저녁 회식자리에서 충성서약을 하듯 사발주를 만들어 돌려 마셨다거나, 공개된 자리에서 자기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임원에게 거침없이 반말을 하는 것이 꼭 한두 재벌 총수의 행태는 아닐 것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경우 계열사 최고경영자들이 부모상을 당해도 직접 조문을 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특권의식이 아닐까?

한보의 정태수 전 회장이 국회 청문회에서 회사의 임직원을 가리켜 "머슴들이 무엇을 알겠느냐"고 말해 화제가 됐지만, 그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전경련의 한 임원은 "대부분의 재벌총수들이 밑의 임직원들을 '머슴'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들이 지배구조 개선에 힘쓰고 거수기에 불과했던 이사회를 실질적인 최고의사결정기구로 정상화하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오너'인 재벌총수는 여전히 예외다. 더욱이 평균 4~5% 밖에 안 되는 적은 지분만으로 황제경영을 하면서 책임은 제대로 지지 않는 한국 재벌의 소유지배구조는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재벌의 특권의식과 후진적 기업지배구조가 온존하는 배경에는 '재벌=성역'이라는 등식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한국사회의 후진성이 있다.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수사를 둘러싸고 이미 경찰의 재벌 봐주기가 도마 위에 올랐지만, 한국 재벌들은 사실상 '치외법권'이다. 법을 어겨도 제대로 처벌을 받지 않는다.

▲ 지난 3월, 두산중공업 주주총회에서 주주 대리인으로 참석한 경제개혁연대 관계자들이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의 등기이사 선임 문제와 관련해서 법원 판결문을 인쇄한 현수막을 들고 질문하자 진행요원들이 뺏으려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참여정부도 '재벌공화국 키우기'에 일조

청와대는 '성역 없는 수사'를 강조했지만, 참여정부 역시 '재벌=성역'의 등식을 더욱 강화시킨 장본인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수백억원대의 회계부정을 저지른 두산그룹 총수일가에게 집행유예라는 면죄부가 내려졌다. 한해 매출액이 150조에 이르는 재계 1위의 재벌인 삼성의 소유·경영권을 총수 아들에게 세금도 내지 않고 넘겨준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발행 사건의 수사와 재판은 10년째 끌고 있다.

재벌총수의 일탈행위가 가능한 것은 한국사회가 이런 '재벌공화국'이기 때문이라고 하면 지나친 얘기일까? 김 회장이 경찰의 출두 요구를 두 차례나 거부하다가 마지못해 응한 것도, 그만큼 대한민국의 법이 재벌에게는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반증일 것이다.

한화가 외환위기 이후 급성장한 것과 관련해서는 김 회장의 경영 능력을 평가해야 한다. 김 회장은 외환위기 이후 과감한 구조조정을 통해 체질개선에 앞장섰다. 능력도 없으면서 부모를 잘 만나 재벌총수 자리에 오른 수많은 재벌 2·3세 기업들이 문을 닫을 때 한화는 위기를 오히려 기회를 삼아 재계 9위로 도약했다.

하지만 김 회장이 지금껏 보인 경영능력이나 수완이 앞으로도 계속 유효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대한생명·명성(현 한화국토개발), 한양유통(현 한화유통) 등 한화의 주력회사 상당수는 직접 만든 게 아니라 부실기업을 인수한 것이다. 부실기업 인수과정에서 으레 정관계 불법로비 의혹이 불거지는데, 김 회장 역시 예외가 아니다.

김 회장은 25년 이상 한화그룹 최고경영자 자리에 있으면서 수차례 위험한 고비를 겪었다. 동생과의 재산다툼에 이은 외화밀반출 사건으로 93년에는 유죄판결을 받았고, 대한생명 인수와 관련한 불법로비 의혹, 수차례의 불법정치자금 제공사건 등의 여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김 회장부터 솔선수범해 '내실을 튼튼히'

이번 사건은 그 어느 때보다 김 회장과 한화에 큰 타격을 안겨주고 있다. 당장 수백억이라는 거액과 심혈을 기울여 끝낸 그룹 CI(이미지 통합) 작업이 결국 헛돈을 쓴 꼴이 됐다.

"내실을 튼튼히 하여 세계 정상으로 나아가자."

김승연 회장이 대한생명 본사인 서울 여의도 63빌딩 앞 초석에 써넣은 글귀이다. 하지만 정말 내실을 기해야 할 사람은 김 회장 자신임이 드러났다.

조석래 신임 전경련 회장도 기업 투자가 부진한 이유를 정부의 정책 불확실성과 규제, 국민의 반기업정서로 돌리는 '네 탓 타령'을 계속할 때가 아니다.

재계 차원에서 국민에게 진정으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기업으로 거듭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곽정수 기자는 <한겨레> 대기업 전문기자입니다.


#한화#김승연#보복폭행#재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