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호필이 누구야?"
김건호씨는 이 한 마디를 물었다가 동료 여직원에게 '구닥다리' 취급을 당했다.
"저 놀리는 거죠?" 동료 여직원은 되레 물었다. 김건호씨는 황당했다. 석호필이 누군데 이상형이란 거야? 지나가던 동료도 한 마디 거들었다. "진짜 몰라요? 농담이죠?" 솔직히 모른다고 했다간 딱 '덤 앤 더머'로 몰릴 태세였다.
김씨는 세태에 빠삭한 친구에게 얼른 메신저로 물었다. "석호필 아냐?" 친구가 말했다. "<프리즌 브레이크>. 죽이지." 그날 밤 김씨는 밤을 꼴딱 새웠다. 친구 따라 '미드'에 간 결과랄까?
처음엔 그저 한두 편만 보고 잘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 맘이 내 맘이 아니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궁금해서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다. 봐야했다. 궁금했다. 다음 편이 어찌 될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자리에 누우면 테트리스 막대기가 천장에서 쏟아지던 중학교 시절, 자리에 누우면 천장에서 고수들이 싸움을 벌일 만치 무협지에 탐닉하던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듯 했다. 그래도 재밌었다.
김씨는 생각했다. "우리 드라마는 왜 이렇게 못 만들지?"
당신의 폐인등급은 미드 초보? 지존?
원래는 '미드(미국드라마)'가 아니었다. '외화 시리즈'라 불렀다. TV에서 시들한 인기로 사라졌던 외화 시리즈가 속속들이 귀환 중이다. 이젠 이름도 바뀌었다. < X파일 > 등을 이르던 '외화시리즈'가 아니다. '미드'다.
SBS '뉴스앤조이'가 조사한 결과, 성인 40.1%가 미드를 시청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냥 시청하는 정도가 아니라 "열심히 보는 마니아"라 답한 응답자, 소위 '미드 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응답자가 6.8%에 달했다.
그런데 '미드'에 빠진 이들도 단계를 밟는다. 네이트 드라마 24에는 '미드'를 즐긴다는 이들을 '미드 초보' '고수' '지존'의 3단계로 나눈 글이 올라 눈길을 끌었다. 예를 들어 지금 보던 '미드' 시즌1이 끝나간다(미국은 시즌제로 나눈다).
그 때 당신의 반응은? "우와. 정말 최고다. 다른 거 추천받아야지." 이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제 막 입문한 '미드 초보'다. 앞으로 볼 게 많다.
하지만 "2편 밖에 안 남았네. 아까워서 못 보겠다"고 한다면? 이미 당신은 '미드 고수' 반열에 들어섰다. 봐야 할 미드보다 본 미드가 많은 단계다.
하지만 이 단계도 지나고, 이제 웬만하면 다 본 거라, 뭘 보나 한숨만 나온다면? 오죽하면 옛날에 나온 '올드 미드' 가운데 괜찮은 게 없나 찾아보거나, 봤던 걸 다시 또 본다면? 당신은 '미드 지존'이다.
그래서 '미드 중독병'이 걸리면, "아, 한 편만 더 봐야지. 한편만 더. 한편만" 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인 단계를 지나, 끝내는 그냥 꿈에서 자기가 주인공이 된다.
<프리즌 브레이크>, 드디어 지상파로
미드가 어느 정도 시청률을 보장하면서, 케이블 TV는 지금 '미드'시대다. 국내 케이블TV간에도 좋은 '미드'를 얻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고 최근 2~3년 사이 미드 구매가도 상승했다. 온미디어 구매팀 김은정 차장은 "2000년에 비해 구매가가 평균 3배가량 상승했다"고 말했다.
MBC TV 영화부 유건욱 PD는 "미드는 한동안 큰 장점이 없었는데, < CSI >같이 체계적이고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면서 미국에서도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끌어들이는 효과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미국뿐 아니다. 유건욱 PD는 "심야시간대지만, 국내에서도 웬만한 영화보다 < CSI >가 시청률이 더 높다"고 말했다.
토요일 밤 같은 시간 방송하는 영화들 시청률이 보통 1~4%인 데 비해, < CSI >는 그보다 훨씬 높은 수치인 6.2%에서 최고 8% 가량 시청률이 나온다는 것이다. 반면에 드라마 구매가가 외화보다 싸다. 방송국한텐 '미드'야말로 일석이조다.
그래서일까? 미드계의 황금거위 같던 <프리즌 브레이크>가 드디어 지상파 방송을 탄다. SBS는 오는 24일부터 매주 목요일밤 12시 35분에 <프리즌 브레이크>를 방송한다.
SBS 영화팀 배숙현 PD는 "너도 나도 석호필을 얘기하기 전인 지난 8월에 <프리즌 브레이크>를 구입했다"며 "오래 동안 외화 시리즈 시장이 없었는데 <프리즌 브레이크> 정도면 시간을 내줄 만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이유는 또 있다. 배숙현 PD는 "< CSI > 같은 시리즈는 한 회에 이야기 끝나는 시추에이션물이라, 다음회에 보지 않아도 이어진다"며 "하지만 <프리즌 브레이크>는 다음 회에 보지 않을 수 없는 흡인력을 갖고 있다, 경쟁력이 충분히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또 주제나 소재, 그리고 정서적인 것들이 우리하고도 맞는다는 것이다.
실제 이렇게 한 번 보면 다음 회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바람에 '미드' 폐인이 늘었다. 케이블TV로 '미드'를 보던 시청자들도 궁금함에 못 견뎌 인터넷 P2P사이트를 두드리는 일이 늘고 있다. 참을 수 없는 궁금증에, 인터넷에서 '미드'를 찾게 만든다.
그들이 TV가 아닌 인터넷으로 가는 이유
| | | 고수들이 골랐다 "이건 꼭 보시라" | | | | 그럼 '미드' 고수들이 추천하는 '미드'는?
네이트 드라마 24에서 자막팀으로 활동하는 오원석씨는<프렌즈>와 <소프라노스>를 꼽았다. "<프렌즈>는 봐도 봐도 질리지 않으며, <소프라노스>는 마피아 두목 이야기지만, 마피아 보스도 집에서는 가족도 생각하고 그런다는 면을 보여주는 드라마"라서다.
디시인사이드 '제씨'는 HBO가 제작한 10부작 미니시리즈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를 꼽았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상황을 미국 한 공수 부대 시점에서 비춘 전쟁 드라마다. 그런데 사실적인 전쟁 묘사 자체도 놀랍고 굉장한 볼거리지만, "단순히 전쟁의 참혹함이나 영웅담만 그린 게 아니라 사랑과 우정, 공포심과 무기력 등을 잘 표현한 감동적인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고수들은 미드가 탄탄한 이야기 구조에 막대한 제작비, 배우들의 연기력을 칭찬한다. '제씨'는 미드의 장점으로 "얼굴 몸매 반지르르한 연기 못 하는 어린 배우들이 없다"며 "심지어 수사물이나 의학물에 한 편 씩만 등장하는 조연(범인, 피해자, 환자 등)들도 연기가 수준급"이라고 말했다. | | | | |
사실 미드에 빠진 이들이 미드와 접하는 경로는 사실 TV보다 인터넷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보고 싶은 만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MBC 영화부 유건욱 PD도 "미드는 연속성이 있다"며 "지난 회 못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게 또 지상파가 '미드'를 선뜻 수용하지 못하는 이유다.
유건욱 PD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드라마처럼 꾸준히 시청하지 않는다"며, “그래서 <24>는 미국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더라도 우리한텐 먹히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실제 KBS는 토요일 낮에 <로스트>를 방송했다. 김윤진이 출연한 <로스트>는 알려진 대로 미국 내 빅히트작이다. 그런데 인터넷 누리꾼 사이에 알려진 <로스트>의 명성에 비해 시청률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하지만 미드 열풍은 항상 그늘을 끼고 있다. '미드' 열풍의 진원지는 인터넷이다. 불법 동영상과 자막을 다운받아 생긴 열풍이다.
온미디어 구매팀 김은정 차장은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동영상·자막은 엄연히 불법이고 저작권 침해"라며, "발견되거나 신고가 들어오면 본사에 신고해 처리하지만, 워낙 비공식적으로 개인이 올리기 때문에 잡긴 어렵다"고 털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