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의 총리로 인민이 사랑하고, 인민의 총리로 인민을 사랑하고, 총리와 인민이 동고동락하며 인민과 총리의 마음이 이어졌다." ― 천안문광장 저우언라이의 추도 시비(詩碑)에서
베이징 천안문광장에서 그곳을 지나는 중국인들에게 물어보라.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정치지도자는? 답은 천안문 액자의 주인공인 마오쩌둥(毛澤東)이 아니다. 열이면 일고여덟 명으로부터 저우언라이(周恩來)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국가주석 자리에 오른 그날 저우언라이는 총리의 소임을 맡았다. 그리고 이후 1976년 사망까지 26년 동안이나 그 자리를 지켰다. 마오가 중국정부의 최고권력자로서 중국 대륙을 지배하는 동안 그는 언제나 충실히 마오를 보좌해온 '제2인자'였다.
저우가 제2인자임에도 마오보다 중국 인민들로부터 더 사랑받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저자 야부키 스스무의 두 사람에 대한 비교가 그 까닭을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중국 인민에게 "마오쩌둥이 엄격한 아버지였다면 저우언라이는 인자한 어머니였다".
저우가 중국 인민들로부터만 높이 평가받고 있는 건 아니다. 70년대 초반 '핑퐁외교'의 상대였던 키신저 당시 미 국무부장관은 그에 대해 "철학에 능통하고 역사를 통찰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남다른 지략과 재치 있는 언변을 가지고 있고, 풍류를 아는 걸출한 위인"이라고 극찬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저우의 인기는 높아 그에 관한 전기ㆍ평전들이 적지 않게 출간됐다. 그런데 이제 활자가 아니라 영상으로 그를 만날 수 있다. 중국전문 케이블채널 '중화TV'에서 저우의 생애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저우언라이>를 지난 2일부터 매주 수요일 오전 9시, 오후 6시 방영하고 있다.
지난 98년 CCTV에서 제작한 총 12부작의 다큐멘터리로 항일운동 시기부터 프랑스 유학시절, 국공합작, 연안대장정, 신중국 성립,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중미수교, 그리고 1976년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저우의 생애 전체를 조명하고 있다.
생애 마지막 몇 달 동안 저우는 모두 13번의 수술을 받아야 했다. 1976년 1월 5일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잠시 깨어난 저우는 의사들에게 "이제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다른 동지들을 빨리 돌보라"고 말했다. 저우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그리고 사흘 뒤인 1월 8일 '중국인민의 벗' '중국의 영원한 총리' 저우언라이는 눈을 감았다. 향년 78세. 그로부터 8개월 뒤인 9월 9일 이번엔 마오가 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