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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담 시집 <살구나무經>(개미, 2007)
ⓒ 개미
지난 주말(5월 12일), 충북 옥천에서 열린 ‘정지용문학제’ 현장에서 스님 한 분으로부터 친필 사인이 담긴 시집 한 권을 건네받았다. 스님께 더군다나 비구니스님한테 시집을 선물 받기는 난생 처음이다. 며칠 전 도서출판 ‘개미’에서 <살구나무經>이라는 시집을 펴낸 원담 스님이 바로 그분이다. 원담 스님은 현재 경남 의령군 부림면에 소재하고 있는 신라 천년 고찰 유학사 주지스님, 격월간 <아름다운 인연>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유학사에서는 5월 20일(음력 4월 4일)에 ‘108예참(禮懺)법회’를 입재한다. 회향은 8월 19일. 이 법회의 캐치프레이즈는 '기도하는 아버지가 있어 우리 집은 행복합니다'인데, 30세 이상 남성 신도 108명을 대상으로 매 안거마다 약 100일 동안 108배 정진을 진행하는 형식이다. 기도하는 아버지, 건강한 아버지가 우리 사회의 가정을 튼실하게 하는 기초인데, 이 법회가 큰 호응을 얻었으면 싶다.

스님의 설법(說法)을 듣는 게 아니라 개인 서정시를 대면하는 것은 스님의 내면 속살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 같아 좀 송구스럽기도 하다. 시집 <살구나무經>도 원담 스님의 속마음, 내면 무늬를 오롯이 담고 있다.

유학사 후원에
늙은 살구나무
봄날에 눈부시도록 꽃 피우더니
지나가는 바람에 꽃잎 어지럽게 떨구더니
뒷방에 앉아 졸고 있던 날
지붕 위로 떨어지는 살구 알 소리에
내 속 깊은 죄
쏟아져 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살구나무經>전문.


인용한 시는 시집의 표제시(表題詩)이기도 한데, 유학사 후원에 있는 늙은 살구나무가 지붕 위로 떨어뜨리는 살구 알 소리에 자신의 죄업을 돌이켜 본다는 내용이다. 살구나무를 통해 내가 깨달으니 그것 또한 경(經)이 아니겠는가. 이 시집은 특이하게도 소제목이 모두 이 경(經)으로 이뤄져 있다. 1부가 ‘살구나무經’이고 2부가 ‘중생經’, 3부는 ‘마음經’ 4부가 ‘산중經’이다. 이렇게 원담 시인이 ‘經’을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미숙한 마음, 완성되지 못한 마음, 길 위에 있는 구도자로서의 솔직한 자기표현인지도 모른다.

“지우고 또 지우면서/꿈 속에서 꿈을 꾼다/까맣게 늙어가는 목숨 하나/어둠 속 깊이 떨고 있다//번민으로 물이 들고/번민으로 꿈을 꾸는/찰라마다 열리는 세상/뒤척이는 바람으로 살아 있는 숨소리/창 틈으로 들어오는 밤“
-'밤' 전문.


인용한 시에서는 번민으로 물이 들고 꿈을 꾸고 어둠 속에 깊이 떨고 있는 화자의 솔직한 목소리가 잘 드러나 있다. 도(道)를 얻고자 길을 떠난 구도자의 진솔한 이러한 목소리는 시집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내 안에 한생각이 풀이되고 풀꽃이 되고 나무가 되고/숲을 만들며 새소리 물소리 바람결로 하루가 저뭅니다”('한생각'), “낙엽이 지듯/멀어져가는 인연의 끈을 모두 사루어 버리던 날/정작 내 안에 번민은 태우지 못했습니다.”('편지'), “살아생전 다하고 가야 할 그 무엇처럼/진언으로 소리 내어 부르는 내 노래”('풍경소리'), “나는 어디에도 없다/나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나는') 같은 목소리가 바로 그러하다.

시인이자 비구니승(僧)인 원담 자신을 ‘풍경소리’에 빗대어 “살아생전 다하고 가야 할 그 무엇처럼/진언으로 소리 내어 부르는 내 노래”라는 시적 진술에 그저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 노래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만날 수 없”는 참된 ‘나’를 찾아가는 노래이리라.

원담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살구나무經>에서 가장 빼어난 시 1편을 꼽으라면 나는 아래의 '하조대에서'를 들겠다. 나도 시인의 바람처럼 아침 산책을 하듯 보이지 않는 바다 위를 걷고 싶다. 해인(海印)에 닿고 싶다.

짠물기가
얼굴로부터 스며들더니
온몸으로 피가 되어 돈다
발목까지 쌓인 눈 위
달빛마저 사람을 외롭게 하는 밤
멀리 순찰도는 군인들 그림자
파도는 지칠줄 모르고 춤을 춘다

아무도 없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소리로 듣는 바다 앞에
끝없는 육지만이 평온하다
바다 위를 걷고 싶다
저 차가운 달빛이 지기 전에
깃털처럼 가벼운 세상을 두고서
마치 아침 산책을 하듯이

-'하조대에서' 전문.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원담 시집-살구나무經(도서출판개미, 103쪽, 7000원)


살구나무經 - 개미시집 2007

원담 지음, 개미(2007)


#살구나무경#원담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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