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3위엔이면 산다. 1위엔 깎으려고 더위를 더할 필요도 없고 가난한 중국 서민들과 노동의 가치를 가지고 토론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웬 아주머니가 다가오더니 5위엔이라고 한다. 이건 너무 하다 싶어 지나쳐 조금 더 가니 2위엔이라 해 얼른 샀다.
지도를 사고 터미널 앞에서 호텔을 찾았다. 이곳에서는 그냥 아무 곳이나 들어가면 수준이나 가격이 다 비슷하다. 터미널 바로 옆 한 작은 호텔, 60위엔 방에 들어가니 생각보다는 안락해 기분이 좋았다. 지도를 펴고 바로 '뮬란'의 사당 위치를 찾았다. 지도에 무란츠(木兰祠) 사진은 있는데 가는 방향을 종잡을 수 없다.
호텔 직원에게 물으니 멀다고 한다. 택시를 타면 아마 50위엔 이상 줘야 할 거란다. 택시를 잡아 얼마냐고 했더니 무란츠는 시내에 없다고 퉁명스럽게 말한다.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다른 택시기사가 뒤따라오기에 100위엔에 왕복으로 가자고 했더니 타라고 한다. 조금 지나 친구에게 가는 길을 물어 보겠다고 한다. 그리고는 친구가 150위엔은 받아야 한다니 20위엔을 더 내라고 한다. 이렇게 장난하면 내린다고 했더니 그냥 가자고 한다.
시내를 거쳐 동남쪽으로 1시간 20분이나 걸렸다. 한자도 어려운 위청(虞城)현이란 곳에 들어서니 아주 가난한 농촌 구석에 사당이 나타났다. 택시기사에게 같이 들어가자고 했더니 사양한다. 사당 앞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사당 안으로 들어서니 자그마한 정원에 비석 몇 개가 서 있고 나무와 풀들이 포근하게 정돈돼 있다.
취재를 하는데 꼬마 아이들 셋이 쪼르륵 피하더니 다시 옆으로 조심스레 다가온다. 아이 엄마들도 덩달아 구경삼아 따라 온다. 아이들에게 사진도 찍어주고 촬영도 하니 순박하게 웃고 떠든다. 역시 시골이라 아이들이 해맑다. 그런데 마침 가져간 선물, 슈촬(书签儿, 북마크)이 2개뿐이라 난감했다.
한국의 문양이 새겨진 것이라 설명하고 나니 아이들 눈빛이 초롱초롱해 더 고민이다. 마침 여자 아이가 가장 크다기에 여자 아이에게 미안하다며 "뚜웨이부치"(对不起)라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웃으면서 괜찮다는 표정이다.
사당 위에 샤오리에지앙쥔츠(孝烈将军祠)라는 간판이 눈길을 끈다. 효성스럽고 용맹한 장군의 사당이라니 말이다. 무란츠에 있는 상치여우씨엔즈(商丘县志)에 따르면 뮬란은 성이 위(魏)씨다. 전쟁이 나서 모병이 있었는데 스스로 갑옷(甲)을 입고 투구(胄)를 쓰고 화살(箭)을 걸고 자루(囊)를 메고 연로한 아버지와 어린 남동생을 대신했다고 한다.
12년 동안이나 남장을 한 채 주살을 걸치고 말을 타고 전쟁에 나가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니 황제가 그 공을 치하하고 벼슬을 내렸다 한다. 그러나 정중히 거절하고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황제는 그녀의 공을 기려 시호를 내렸다고 전해지는데 실제로는 당나라 시대에 '효열장군(孝烈将军)'을 추서했다 한다.
이 사당은 당나라 시대에 처음 세워졌다 한다. 재미있는 것은 뮬란이 전설로 내려오는 것이라 정확하게 어느 시대 사람인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의 성이 위씨라고 전해지는 것으로 미루어 북위 시대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모병이 훈족의 침입이라는 점과 비슷하기도 하다.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뮬란의 전설을 백성들에게 우상화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디즈니 만화영화 역시 이 전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서양의 시각에서 각색했으니 오죽했으랴. 특히 서양유럽 역사에서 잊고 싶었던 기억인 훈족을 악마로 묘사한 것이야말로 디즈니 자본의 세계 침공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가 세계사에서 배운 적이 있는 '훈족의 대이동'은 바로 가치의 판단이 아니라 역사 그 자체일 뿐이 아닌가.
무란츠 곳곳을 둘러보는데는 30분이면 족하다. 전설 속에 피어난 이야기 그 자체로 아름답다. 사당 안에는 뮬란과 그 가족의 동상이 나란히 있다. 3면벽에는 뮬란의 전설을 그려놓기도 했다. 비록 큰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사당의 모양새가 현대적 상품으로 자리 잡지는 못했지만 따스한 햇살만큼 포근한 정원이 멀리까지 온 보람을 느끼게 한다. 중국 사람들과의 대화 역시 시골로 갈수록 더 순박해진다는 것을 느꼈으니 100위엔도 아깝지 않다.
다시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합승을 해도 되겠냐고 한다. 두 사람을 더 태운 택시가 시내로 들어서자 자꾸 새로운 곳을 소개한다. 자기가 데리고 가겠다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따로 갈 곳이 있다면서 상치여우구청(商丘古城)을 말했더니 거기도 20위엔이면 데려다 준다고 한다. 시내로 들어서자마자 내려달라고 했더니 핸드폰 번호를 알려준다. 내일 연락하면 곧바로 오겠단다.
이곳 고성은 시내 남쪽에 있는데 버스는 1위엔, 택시를 타도 10위엔이면 간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었다. 고성 문에 들어서니 벌써 시끌벅적하다. 보통 중국의 고성에 가면 한가운데 도로를 중심으로 좌우 앞뒤로 볼거리가 많다. 시간도 많지 않고 하니 허우팡위(侯方域) 집안의 고거를 빨리 둘러보고 시장거리를 거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허우팡위은 상치여우 일대에서 역사상 최고의 재사로 일컫는다.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초기의 유명한 문학가이다. 명나라 시대에는 호부상서(户部尚书)를 역임하기도 했고 청나라 초기에 이르러 '국초삼가(国初三家)' 중 하나로 명성을 이었으며 '장매당집(壮悔堂集)'을 남기기도 했다. 대대로 이어온 집안의 풍모가 남는 옛집을 구경하니 그 옛날 문장의 냄새가 한껏 묻어나는 듯하다.
그리고 고성의 골목골목을 훑기 시작했다. 갖가지 길거리 먹을거리에 손과 입이 따랐고 지나는 사람들 모습들, 독특한 가게들에도 눈길과 발길이 이어졌다.
용기를 내 그 먹기 힘들다는 처어떠우푸(臭豆腐)에도 도전했고, 허기를 채우려 물 만두국과 비슷한 훈둔(馄饨) 한 접시도 비웠다.
처어떠우푸는 발 냄새 비슷한 꼬랑내 나는 두부다. 썩힌 두부라고 생각하면 된다. 대부분 우리나라 사람들 중 이것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양콰이(两块) 한 접시에 4개를 먹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2001년도에 베이징의 한 호텔 아침 뷔페에 나온 이것을 멋모르고 먹었다가 약간 곤란했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 아무렇지 않게 먹게 되니 그만큼 나도 중국에 적응을 했나 보다.
훈둔은 원래 전통 북방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아주 오래 전 한나라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음식인데 완전 밀봉된 만두 형태라 그 구멍이 전혀 없다는 의미로 훈둔(混沌)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발음이 비슷한 훈툰(馄饨)으로 바뀌었는데 대체로 우리는 그 발음도 훈둔으로 그냥 하고 있다.
지금은 중국 전역에 길거리 음식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이며 훈둔 전문식당도 꽤 많다. 만두에 약간의 국물을 부은 것인데 물기가 듬뿍 담긴 만두를 숟가락으로 하나씩 떠먹으면 맛이 제법 좋다.
북쪽부터 남쪽으로 거리를 걸어 남문을 나가면 호수가 있는 공원이다. 아이들은 공속에 들어가 물 속으로 뛰어든다. 중국 곳곳에 있는 물 위를 걷는 풍선이다. 물 위를 걷는 느낌이야 좋겠지만 공기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더울까 걱정도 된다.
다시 고성 안으로 들어와 거리 전체를 보려고 고성에 올랐다. 이곳 역시 5위엔을 내야 했다. 고성 위에서 바라본 시골마을도 점점 저물어간다. 어느덧 시골 장터에서 놀다 보니 해가 지는지도 몰랐다. 포근한 정서가 거리마다 잘 진열된 정감 어린 상치여우구청에 푹 빠진 하루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http://blog.daum.net/youyue/10566733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