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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악한 전쟁을 그만두라"는 메시지가 담겼던 STOP표지판. 누군가 다시 빨간 페인트로 '추악한 전쟁'을 지워버렸다.
ⓒ 한나영

인구 5만이 채 안되는 버지니아주 해리슨버그의 도심. 간선도로로 진입하는 좁은 1차선 도로 옆에 빨간 교통표지판이 하나 서 있다.

"STOP(정지)"

신호등이 없는 좁은 길인 만큼 큰 길로 진입하려면 일단정지를 해야 한다. 큰 도로와 연결되는 이 곳은 시내 진입로인지라 오가는 차량들이 제법 많다. 그런데 어느날, 이 표지판이 크게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공공기물인 이 도로표지판에 누군가 하고 싶은 말을 적어놓은 것이다.

"DIRTY WAR(추악한 전쟁)"

그러니까 STOP이라는 단어 아래 DIRTY WAR라는 말을 붙여 "추악한 전쟁을 그만두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었다. 표지판에 쓰인 글씨가 반듯하지 않은 걸 보면 누군가 홧김에 써놓은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나서 휘갈긴 것 같기도 했다.

예사롭지 않은 이 사건을 목격하면서 나는 카메라를 떠올렸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그만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표지판이 정상(?)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STOP' 아래 적혀있던 'DIRTY WAR'는 다시 빨간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 '침울한 미국인들'. AP통신의 여론조사 결과가 지역신문의 머릿기사로 실려있다.
"전쟁에서 그만 발빼라"

끝날 줄 모르는 이라크 전쟁에 대해 미국인들의 비난의 소리가 높다.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격으로 돈이 들어가는 것도 불만이다. 이들은 현재의 전쟁이 미국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던 월남전의 재판이 되는 게 아니냐며 우려의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지난 21일 해리슨버그 지역일간지인 <데일리뉴스레코드>에도 이와 관련된 머릿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AP통신이 송고한 '침울한 미국인'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미국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설문조사 분석 기사였다. 먼저 이 기사에 실린 이라크 전쟁과 관련된 미국민들의 여론을 살펴보자.

"우리는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아직도 계속하고 있다. 정말 큰 일이다."- 온건한 공화당 지지자, 래리 워드(47)

"우리가 전쟁을 싫어하는 만큼 저들도 하던 일(전쟁)을 끝내고 그곳을 빠져 나오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곳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하면 좋을 것 같다. '좋아. 이제 너희 문제는 너희가 풀어봐. 우리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학교 비서로 정년퇴임한 보수주의자, 앤 베일리(69). 아들과 손자가 현재 이라크에 복무중이다.

"전쟁에서 발을 빼고 이제는 경제를 살려야 한다. 미국 밖에서 돈이 쓰이는 것을 당장 중단하고 다시 그 돈을 국내로 가져와야 한다. 이 모든 일은 백악관에서 시작해야 할 일이다."- 보험회사 분석가인 민주당 지지자, 리사 폴라드(45)


AP통신과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입소스가 흥미로운 설문조사를 벌였다. 지난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미국의 성인 1천명을 대상으로 매년 미국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조사한 것이다.

전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면서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초강대국 미국. 이렇게 힘 있고 돈 있는 나라 국민들은 얼마만큼의 자존감을 갖고 있을까. 초강대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을까.

비관적인 미국 국민들

▲ 거세지는 비관론. 남성의 1/3, 여성의 1/5만이 미국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응답했다.
"NO"

AP통신이 전하는 설문조사 결과는 대단히 비관적인 문장으로 시작된다.

침울하다. 남성·여성·백인·소수인종 - 모두가 자신의 국가에 대해 전쟁에 싫증난 비관주의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같은 느낌을 공유하는 것은 전례없는 일이다.

이달에 발표된 '미국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라는 설문조사에서 "그렇다"고 대답한 응답자는 겨우 25%였다. 여론조사가 시작된 2003년 12월 이래 가장 낮은 수치다.

현재의 침울함은 전반적으로 이라크 전쟁과 부시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이 기사는 미국인의 침울함에 대해서 각 집단별로 분석을 했다. 성별로 보자면 남성 10명 가운데 3명, 여성 10명 가운데 2명만이 미국이 잘 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인종별로는 백인의 28%, 소수인종의 18%가 2003년 말과 같은 "낙관적"이라는 응답을 보였다. 설문조사 시작 당시와 비교하자면 절반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다. 특히 남성과 백인들보다 여성과 소수인종의 만족도가 낮았다. 그러나 네 집단 공히 기록적인 최하위의 만족도를 보였다.

AP-입소스의 설문 조사 결과는 계속된다. 이들은 2003년에 비해 절반밖에 안 되는 낮은 만족도를 보인 응답자들에게 다시 물었다. 왜 미국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게 되었느냐고.

이에 대해 3분의 1은 전쟁을, 4분의 1은 빈약한 리더십을 비난했다. 또한 9%는 경제탓, 8%는 도덕률의 실종, 5%는 기름값을 원인으로 돌렸다.

▲ 지난 2003년 5월 1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호 선상에서 이라크 전쟁의 임무 완료를 선언한 뒤 병사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그로부터 4년후, 2007년 미국민들은 바로 이라크전과 리더십 부족을 이유로 미국의 미래를 어둡게 보고 있다.
ⓒ 미 국방부
이번 여론조사 결과를 두고 이를 유권자들의 표와 연결시키려는 논의도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대통령 선거를 18개월이나 남기고 있지만 현재의 이런 낮은 만족도는 공화당에게 불리한 징조이고, 민주당에게는 낙관론을 가져다 준다는 분석이다.

인종도 성별도 뛰어넘어 '부시 거부' 한 목소리

재미있는 것은 이번 AP 기사가 실린 'ABC뉴스' 인터넷판 관련 기사 댓글이다.

"25%? 이 수치도 너무 높은 것이다. 백악관의 무능함에 대해 뭔가를 하기에 이제는 시간이 없다." (아이디, lahlbran)

"물론 미국인들은 행복하지 않다. 우리는 역대 최악이자, 정직하지 못한 대통령과 악 그 자체인 부통령을 갖고 있다. 이런 비겁한 대통령이 나가야 비로소 우리는 다시 행복해질 것이다. 왜 멍청한 얼간이를 탄핵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일단 백치 대통령이 사라지고 나면 미국인들이 예전의 명성과 위상을 회복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다." (아이디, jimridley160)

"나도 동의한다. 부시와 그 일당들은 나가야 한다. 그들의 비열한 행동은 미국인들에게 많은 희생을 치르게 했다. 전쟁을 통해서 얻는 부당 이득과 기업의 탐욕적인 이득은 이제 전혀 새로울 게 없다. 나는 우리나라를 정말 사랑한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지만 앞으로의 상황이 나아지기보다는 더 나빠질 것이라고 본다.

70년대 오일쇼크와 경제위기를 겪은 나로서는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에너지 위기·전쟁·테러·기후변화·경제붕괴·총기폭력·범죄율 증가, 마약 등의 문제들이 오히려 70년대를 더 낭만적으로 보이게 한다. 나는 정부가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이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부의 도움과 지원이 필요하긴 하다." (아이디, John G)


네티즌들의 반응 역시 여론조사 결과와 마찬가지로 비관적이다. 하지만 AP 기사 말미에 적힌 한 은행 프로그래머 로버트 비어드(49)의 말이 그나마 미국에 희망을 안겨주는 것 같다.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문제들을 잘 헤쳐나갈 것이다. 그래서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 강한 나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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