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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과 함께 떠난다!
김훈과 함께 떠난다! ⓒ 정민호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 거리 한국관광공사 앞. 출근길에 바쁜 사람들의 발걸음이 한 번씩 멈춘다. '소설가 김훈과 함께 가는 남한산성'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린 버스 3대가 나란히 서 있었기 때문이다.

김훈의 <남한산성>. 국내문학으로는 오랜만에 종합베스트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던 화제작으로 45일 만에 10만부가 팔린 작품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 번씩 멈출 만 하다. 또한 부러운 시선으로 바뀌는 것도 어찌할 수 없다. 출근길에 바쁜 그때, '작품 현장에서 노닐다'라고 하니 그럴 수밖에.

그렇다면 이 버스에 오를 수 있는 행운을 쥔 사람들은 누굴까? 인터넷 서점 YES24에서 참가 신청을 한 뒤 운명적으로 당첨을 받은 70여명이 그들이다. 주최 측에 따르면 참가 신청자가 모집 인원의 10배수라고 하니 경쟁률만 10:1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버스에 오르기 전, 김훈을 힐끗 바라 보는 그들의 얼굴에 설레는 기색이 역력하다.

삼전도 치욕의 현장을 가다

삼전도비를 설명하는 김훈
삼전도비를 설명하는 김훈 ⓒ 정민호
오전 9시 30분,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가이드가 인사를 한다. 그리곤 김훈의 작품에 관한 문제를 내준다. 경품은 영화 예매권과 커피 상품권. 사람들이 지루해 할까봐 주최 측에서 준비한 작은 이벤트인 셈인데 결과는 성공적. 버스로 이동할 때는 김훈이 없으니 시큰둥할 법도 한데 일부러 김훈을 만나러 온 사람들이라 그런지 높은 관심을 보였다.

버스는 삼전도비를 보러 가기 위해 잠시 멈춘다. 김훈과 함께 도심을 걸어 작품 속으로 들어가는 행사다. 작은 깃발을 들고 걸어가는 70여명의 사람들이 신기했을까? 걷다보면 행인들이 "뭐하는 사람들이에요?"라고 묻기도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일부러 멈춰 서서 행사의 의미를 설명하기도 했다.

이색적인 모습이다. 이 행사를 만드는데 한 몫한 YES24라는 인터넷 서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인터넷이 생활화되면서 사람들은 서점의 낭만이 사라졌다고 했다. 과거에는 모여서 함께 공부도 하고, 토론을 하는 기회를 제공했던 곳이 오프라인 서점이었지만 인터넷 서점이 등장하면서 그런 모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집안에서 마우스만 '클릭'하는데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낭만의 실종이라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YES24를 통해 모인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그것이 오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인터넷 서점도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문화적인 이벤트를 열 수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인터넷 서점의 또 다른 가능성을 확인한 순간이다.

여러 생각이 드는 사이, 마침내 중간 목적지인 삼전도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김훈은 작은 마이크를 들고 삼전도비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말이 괜한 소리는 아닌 듯싶다. 몰려든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김훈과 가까이 있으려고 다가서고 한마디 말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두 귀를 세웠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지만, 사람들의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김훈'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남한산성을 김훈과 함께 걷다!

김훈의 설명에 다들 정신집중!
김훈의 설명에 다들 정신집중! ⓒ 정민호
버스는 커브길을 계속 돌더니 마침내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남문을 시작으로 남한산성을 돌기 시작한다. 중간 중간 김훈이 멈춰 서서 마이크를 잡고 장소에 대한 설명을 해준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이 <남한산성>속의 어느 장면인지를 떠올린다. '작품 현장에서 노닐다'라는 광고가 괜한 말이 아닌 셈이다.

좁은 서문에 이르러 김훈은 다시 설명을 시작했는데 얼굴 표정이 진지해진다. 왜 그런 걸까? 이곳은 인조가 항복을 하러 나왔던 문이다. 들어올 때는 남문으로 들어왔지만, 나갈 때는 너무 작은지라 말을 탈 수 없는, 그래서 임금이 걸어서 나가야 했던 '치욕의 현장'이다.

그런데 김훈은 이곳에 와서 "돌덩이들을 만지곤 한다"고 말했다. 이어 "고통스러운 치욕의 삶이지만 다른 미래로 가는 길을 보여주기에 다시 해봐야겠다는 경건한 마음을 품곤 한다"고 덧붙인다. 김훈이 걸어온 길을 알아서인가. 그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숙연해진다.

점심 식사 후 행궁에 이르러서는 연극이 시작됐다. <남한산성>을 25분짜리 짧은 극으로 각색한 것인데 김상헌, 최명길, 인조, 나루, 최명수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모습이 심상치 않다. 그 연기 때문인지, 아니면 <남한산성>을 떠올리며 보기 때문인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꼼짝을 않는다. 극이 끝난 후 박수가 쏟아지는 건 당연한 일.

"빈약하지만 과장되지 않은, 양심적인 희망 보여주려 했다"

최명길과 김상헌의 대립을 그리는 한 장면
최명길과 김상헌의 대립을 그리는 한 장면 ⓒ 정민호
이어서 사람들이 가장 기다리던 시간이 찾아왔다. 작가와 직접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것.

- 혹독한 글쓰기 훈련을 받았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기자시절 잔혹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게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는 몰라도 정말 그랬습니다. 그리고 어려서 아버지를 대신해서 대필을 해야 했어요. 아버지가 말로 하시면 제가 적어야했는데 문장을 고치거나 해야 하니까 제가 그걸 다시 읽어야 하기도 했죠. 점을 찍었는지도 확인해야했고….(일동 웃음) 그때 문장훈련을 받은 것 같습니다. 고통스러운 시절이지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 책을 읽을 때, 최명길과 김상헌의 말싸움을 보면서 21세기에 사는 사람으로서 김상헌의 말이 공허하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 말을 내가 인정하면 김상헌을 낮추고 최명길을 높여주는 거니까 큰일인데…(일동 웃음) 김상헌의 말을 공허하게만 볼 수 없어요. 김상헌은 사직의 정통, 인간의 고결함을 추구했습니다.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죠. 다만 군사적 현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최명길은 하나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유일한 말만 하죠. 나는 양쪽의 말이 부딪치는 그 과정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소설에 그리고 싶었던 것은 삶, 일상의 구체성입니다. 이념보다 더 중요한 것인데 냉이나 간장독 같은 게 그런 거겠죠.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지만 구체성이 갖는 힘은 소설에서는 중요한 것이죠."

-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립을 보다가 끝을 보면 그 말들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기대했던 것과 많이 달랐습니다.
"마지막 문장에 하나를 더 썼는데 지웠습니다. 그게 뭐였나면, '남한산성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걸 쓰면 너무 심한 풍자가 되고 독자들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죠. 기대했던 것… 저는 가식적인 희망이 아니라 빈약하지만 과장되지 않은, 양심적인 희망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여성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걸 대신 묻고 싶습니다. '화장'이나 '여자의 폐경'을 보면 여자가 삶에 적극적이지 않고 머뭇거리고 두려워합니다. 많은 여성독자들이 궁금해 할 텐데 그 이유가 뭔가요?
"여자에 대해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일동 웃음) 나는 여자의 인격을 그리지 않고 여자의 생명을 말합니다. 생명이란 짐승 같은 겁니다. 그럼 나는 왜 그렇게 하는가? 생명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싶어요. 그러다보니 인격이 사라지는 거겠죠. 그래서 '연애'이야기도 잘 못 씁니다. 연애미수가 되죠. '그'를 '너'로 만드는 것을 해야 하는데 어려워요. 존재를 전환시켜야 하는데 나는 머뭇거립니다. 풀어보려고 하는데 잘 안 돼요. 그 질문 인정합니다.(일동 웃음)"

즐거운 마음으로 남한산성을 떠난 독자들

독자들의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주는 소설가 김훈.
독자들의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주는 소설가 김훈. ⓒ 정민호
작가 '김훈'만 있었어도 행사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김훈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은 컸다. 빗방울이 떨어져도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 질문하면서도, 김훈의 건강까지도 염려하는 모습에는 적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한국관광공사와 YES24, 그리고 출판사 학고재는 연극과 같은 이벤트 등을 준비해 사람들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애를 썼다. 이름만 그럴 듯한 행사가 아니라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찾아온 독자들을 위해 배려였다.

<남한산성>에서 인조는 치욕의 순간을 견디며 남한산성을 나갔다. 그러나 김훈과 함께 온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남한산성을 떠났다. 김훈과 함께 작품 현장에서 마음껏 뛰어논 때문이다. 오랜만에 보는 즐거운 문학 판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인터넷 서점 YES24에서는 6월9일에 또 한 번 남한산성을 방문한다고 합니다. 참여를 희망하는 분들은 6월2일까지 YES24에서 신청하면 됩니다.


남한산성 - 개정판

김훈 지음, 문봉선 그림, 학고재(2017)


#김훈#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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