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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4년 3월 20일 저녁 6시 '탄핵무효를 위한 100만인 대회'가 서울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60여곳에서 열렸다.
ⓒ 권우성

2004년 봄,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켰을 때, 많은 국민들은 '탄핵무효'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국민의사와 상관없는, 국민주권을 유린한 정치공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필자 또한 많은 미디어매체를 통해 당시 탄핵의 부당성을 설파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때 국민들은 탄핵위기에 처한 대통령을 구해주었다.

그로부터 3년여의 시간이 지난 오늘, 그 때의 기억이 새삼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국민들이 노 대통령을 탄핵으로부터 구출해주었던 것이 지금과 같은 광경을 보려했던 것이 결코 아니었다는 허탈감 때문이다.

현직 대통령의 무분별한 대선개입

현직 대통령의 대선개입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선정국의 한복판으로 몸을 던지는 노 대통령.

그가 참여정부 평가포럼 특강에서 행한 '격정의 연설'은 그 곳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노무현'을 연호케 하는 통쾌함을 안겨주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끼리 환호를 올리며 열광하는 사이, 다수의 국민들은 현직 대통령의 무분별한 대선개입과 막말정치에 대한 극도의 우려를 하게 되었다.

당장 노 대통령의 선거법·공무원법 위반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한나라당은 고발을 검토하겠다고 나섰고, 선관위는 관련법 위반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2004년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대선판을 뒤흔드는 노 대통령에 대한 비판과 반발이 야당과 일부 언론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노 대통령의 언행에 대한 여론의 지형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노 대통령에게서는 과거에 그나마 있었던 '최소한의' 절제조차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언론들은 노 대통령의 발언을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정말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 생각하니 좀 끔찍하다."
"제정신 가진 사람이 대운하에 투자하겠느냐."
"한국 지도자가 독재자의 딸이라고 해외 신문에 나면 곤란하다."
"언론도 개헌을 덮는데 공모했으니 새삼 들고 나오기 민망스러울 것이다."
"정치인들은 언론의 밥 아니냐. 볼펜 들고 카메라 들고 묻는데 어쩌겠느냐. 이를 추파라고 해야 하느냐. 영합이라고 해야 하느냐. 굴복이냐."
"복지 하면 민주노동당이 있는데, 절대로 국회에서 통과 안될 것만 주장하고 생색만 내고 성과는 하나도 없는 그런 정책을 계속 쓴다."
"매일매일 언론한테 얻어맞고 한나라당 한마디 하면 톱으로 해서 또 얻어맞고 맞다가 오늘 나 혼자 아무도 안 말리는 데서 일방적으로 한번…. 참 해 보니까 기분 좋다."


▲ 노무현 대통령이 2일 오후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참여정부 평가포럼' 초청으로 참여정부의 국정운영 평가와 과제에 대한 특강을 하고있다. 노 대통령은 이날 2시간 동안 이어진 `21세기 한국, 어디로 가야하나'라는 주제의 특강에서 참여정부 국정 전반에 대한 정책 성과를 설명하고 미래과제 해결 방향을 밝혔다.
ⓒ 연합뉴스 박창기
이쯤 되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셈이다.

더구나 공격의 초점은 한나라당이지만, 다른 누구도 노 대통령이 날리는 비판의 화살을 피해갈 수는 없는 상황이 되고 있다. 열린우리당, 민주당, 민주노동당, 그리고 진보진영에서부터 언론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노 대통령으로부터 비판과 가르침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언제나 대통령 자신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자신 이외에는 모두가 비판과 가르침의 대상이 되는 장면. '유아독존'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게 되는 것 아닐까.

5년전 노무현 대통령에게 기대를 걸었던 많은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서 느끼는 참담함은 '결국 권력이란 이런 것인가' 하는 실망과 분노 때문이다. 조금의 겸손함도 찾아볼 수 없고 오만함만이 가득한 권력, 그것이 지금 노 대통령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다.

대선판에 개입하며 흔들어대는 데 대한 수많은 비판들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갈수록 목소리를 높이는 노 대통령. 그의 모습에서 많은 국민들이 과연 굴하지 않는 지사의 모습을 떠올리게 될지, 아니면 귀를 닫아버린 또 한 명의 대통령의 모습을 떠올리게 될지, 노 대통령 스스로가 되물어볼 일이다.

비열하게 이기느니 아름답게 져라

혹자는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는데, 그래서 그들을 비난하는데 무엇이 잘못이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집권하느냐 마느냐보다 중요한 것이 선거민주주의(electoral democracy)를 지키는 일이다. 선거민주주의는, 비록 결함도 있지만, 6월 항쟁을 거치며 어느 정도 실현된 우리 정치사회의 보편적 합의이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는 것이 우리 정치의 후퇴라고 판단한다고 해서, 현직 대통령이 선거판에 부당하게 개입해서 선거민주주의를 파괴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어떤 이념을 가진 세력이든, 자신들이 한번 정권을 잡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놓지 않으려는 일이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 그 이유를 새삼 설명해야 하는가.

마침 오늘(4일) <중앙일보>는 "정부 산하기관 세 곳이 합동으로 태스크포스(TF)팀을 만들어 올 2월부터 석 달간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대선 공약인 한반도 대운하 프로젝트에 대한 타당성 조사를 벌여 보고서를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보도하고 있다. 보고서를 작성한 뒤 한국수자원공사 핵심 관계자가 정부 고위 당국자에게 이 보고서를 보고했다는 것이다. 경위는 더 확인되어야 하겠지만, 사실이라면 지나칠 수 없는 문제이다.

비열한 승리보다는 차라리 아름다운 패배가 낫다. 룰을 어기면서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느니, 누가 집권하게 되던 공정하게 룰을 지키는 것이 민주주의 발전에 더 도움이 되는 길이다.

도대체, 현직 대통령의 프리미엄을 이용해 부당하게 영향력을 행사해서라도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아달라는 구차한 요청이라도 누가 노 대통령에게 했나. 왜 범여권 인사들조차 원치 않는 일을 노 대통령은 고집하고 있는가.

국민 다수가 선택한다면, 설혹 그것이 당장은 정치의 후퇴이고 역사의 후퇴로 생각된다 해도,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는 발전하는 것이다.

노 대통령이 선거민주주의라는 틀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지금과 같은 대선개입 행위는 즉각 중단해야 한다. 그것이 상식이며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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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종양 수술 이후 방송은 은퇴하고 글쓰고 동네 걷기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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