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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졸저 '한미일 삼각동맹'은 쓰는데 보다 구상하고 결정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글이 갖는 사안의 민감성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가 일본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포용성을 갖게 되긴 했으나 아직까지는 완전히 자유롭게 말하는 것을 용납 치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제강점기간 동안 100만 명에 가까운 한국인이 징병과 징용 그리고 종군위안부라는 슬픈 운명 속에서 사라져야 했고 지금도 그때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 한일관계에 대해 작심하고 제대로 말하려면 그야말로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결행해야 한다. 이렇다보니 생각은 많았지만 가슴에 담아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필자의 양심상 계속 그럴 수는 없었으며 이제는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미일 삼각동맹'은 초판본인 '한일 안보동맹'을 개정증보 한 것이다. 초판이 나왔을 때 제법 많은 사람들이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거칠게 항의했다. 그중 한 사람은 "일본과 동맹이라니 당신 제정신이야?"라며 상당히 격앙된 목소리로 필자를 몰아붙였다. 그래서 필자가 "선생님께서는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읽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라고 묻자 그 사람은 "이런 책은 제목만 봐도 무슨 내용인지 다 안다"며 "읽어볼 가치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사실 전화나 E-mail을 보낸 대다수가 이런 식이었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제목만 보거나 내용을 보고 싶은 것만 부분적으로 발췌해서 보고 항의부터 하는 모습에서 불쾌함보다는 우울함이 앞섰다. 아울러 '한일관계의 정상화'가 얼마나 멀고 험난한 길인가를 작게나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동안 우리사회에서 일본과의 안보협력문제에 대해서는 각종 기고문을 통해 과거보다 미래를 지향해야 한다는 원칙론이나, 좁은 의미의 안보협력내지 간접동맹을 주장하는 극히 조심스러운 목소리는 있었지만 일본과 포괄적 형태의 안보협력으로서의 직접적인 안보동맹을 구성해야 한다고 책자를 통해 본격적으로 주장하기는 이번이 최초의 시도가 아닌가 한다. 그만큼 파장이 클 것이라는 것을 예고한다.
그러나 비난이 두려워 신념을 꺾을 수는 없었다. 한 줌의 불씨가 광야를 태우듯 필자의 이 책 한 권이 '한일관계의 정상화'를 위한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이를 통해 양국이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설사 맞아죽는 한이 있더라도, 매장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명희가 '혼불'을 쓰듯 혼신의 정열을 바쳐 심혈을 기울였다. '한미일 삼각동맹'은 지난 10여 년간의 그러한 고뇌와 번민과 노력의 산물이다.
김종성 기자는 6. 15공동선언 이후 남북관계가 진전되면서 북한에 대한 적개념(適槪念)이 시들해져 주적(主適)자리가 공석이 되자 미국의 세계전략에 편승해 중국을 새로운 주적으로 상정하고 안보를 빌미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친미매판주의자들이나 수구사대주의자들과 필자가 동일한 부류인 듯한 느낌이 들게 말하고 있는데 이는 정말 엄청난 오류다.
필자는 그 책에서 중국 위협론을 확대 재생산하거나 중국을 적으로 상정하여 안보를 빌미로 장사를 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중국이 과거·현재·미래에 있어 한국에게 얼마만큼의 위협가능성을 지녀왔는지를 정교하게 분석해 알리고자 했을 뿐이다.
중국은 1978년 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의 현대화를 국가의 최고 전략목표로 설정하고 개혁개방을 실시한 이래 지난 28년 동안 연평균 9.3%에 달하는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이룸으로써 세계적인 찬사를 받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중국이 이 같은 성장을 계속할 경우 2007년 독일, 2015년 일본, 2039년엔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새롭게 전개되고 있는 동북아 정세의 핵심요소는 개혁개방정책을 통해 세계의 공장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이 장차 드러내게 될 군사적 야심이다.
지난해 중국의 공식국방비는 3백51억달러로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에 이어 세계 5위 수준이었다. 그러나 다른 예산에 숨겨진 비공식 예산까지 합칠 경우 최저액인 450억달러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일본의 453억달러에 근접한다. 올해 중국의 공식 국방비는 전년대비 17.7% 증가한 449억 달러로 책정됐다. 중국이 지난 16년 동안 매년 10%이상의 국방비 증가율을 기록해 왔음에 비춰볼 때, 중국이 지금 같은 속도로 군비증강을 계속한다면 조만간 미국을 대신해 세계 전략구도를 깰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동북아에서 만큼은 심각한 군사적 불균형이 초래될 수 있음을 예고한다.
중국은 패권을 추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타 모든 패권세력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해오고 있지만 결국 이러한 힘의 바탕은 교역정책에서 해양권까지 군비통제부터 동북공정까지 계속 자신만의 독자적인 법칙을 만들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태도가 주변국들을 불안하게 한다. 세력이 충분해지면 주변국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강요할 것인가.
많은 분석가들은 중국이 지금과 같은 속도로 급성장을 계속한다면 21세기 중반에는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거기다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중화웅비의 꿈은 과거 중국이 누렸던 동아시아 맹주로써의 역할을 넘어 세계적 형태의 신중화질서를 창출하고자 할 것이다. 이제 한국은 중국의 실체를 분명히 확인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김종성 기자는 이 같은 현실에는 눈을 감은 채 중국의 위협을 과거지사로만 돌리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의 패권경쟁의 일환으로 동북아 군비경쟁을 주도하면서 한국에게 대 주변국 대비를 위한 첨단전력건설을 위해 엄청난 국방비 압박을 가중시킴으로써 한국에게 현재진행형의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존재가 바로 중국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의 보수·기득권층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한미동맹 강화만을 외치고 이에 반발하는 쪽은 너무 쉽게 친중(親中)을 말하며, 심지어는 한일관계가 긴밀해지면 한중관계가 최악이 될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일반적으로도 중국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이 관대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끝없이 냉혹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조선 이후부터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참전에 이르기까지 중국이 한국에게 끼친 부정적 영향력은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음에도 1953년에 끝난 중공군과의 혈투는 한국의 뇌리에서 희석된 지 오래지만 그보다 앞서 1945년에 종료된 일제 강권통치의 앙금은 여전히 한국인들의 기억을 지배하고 있다.
이는 한일 양국이 국내외적 이유로 민족주의 교육을 확대 재생산한데 기인한 것임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처럼 한일간의 갈등과 관련된 역사적 적대감은 양국 대중 모두에게 인자적 내지는 정서적인 면에서 체계적인 편견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러한 편견은 양국 관계에서 타협과 양보는 반역죄나 마찬가지라는 불신과 비난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협상 가능성마저 저해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적어도 일본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만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깊고 양심적인 연구와 토론보다는 감정적이고 다분히 적대적 이념의 현란한 문구들만이 판쳐온 게 사실이다. 이 틀에서 벗어나는 경우 사법적 처리대상이거나 망언으로 규정돼 언론재판에 회부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는 진정한 '한일관계의 정상화'를 위한 열린 토론의 장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 원인은 김종성 기자의 지적처럼 일본이 고장난 녹음기처럼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반복하며 집단망각과 부인을 거듭해오고 있는데 있다. 따라서 일본이 지금처럼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가 아닌 말 뿐인 사과에 계속 머무르는 한, 한일관계의 획기적 개선은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관계가 현재와 같은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 한일간에 과거사문제를 극복하려면 미래지향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외교정책의 결정은 생존을 위한 심각한 선택의 문제다. 국제관계는 이상주의나 명분보다 주로 현실주의와 실용주의에 근거한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의 대일관계는 도덕적 원칙이나 편견과 차별에 매몰된 민족주의 감정보다는 오로지 국익에 입각한 전략적 차원에서 냉정하게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특히 국가의 체면과 이해가 걸린 과거사문제의 경우 한쪽의 일방적 승리로 해결되기는 어려운 만큼 비록 일본이 가해자였다 하더라도 문제를 한국의 정서에만 맞혀 해결하려해서는 곤란하다. 과거의 잘못을 꾸짖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의 동아시아 평화공존과 번영을 위한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역사적 적대감 중심의 접근법으로 볼 때 많은 사람들은 감정적 문제보다 현실적 입장을 강조하는 필자의 논리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주장에 신뢰를 부여하는 많은 역사적 선례가 존재한다.
나폴레옹전쟁 당시에는 그 누구도 영국과 프랑스가 협력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으며, 18세기 미국독립전쟁 당시에는 영국과 미국이 동맹을 맺는 날이 오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또 제1,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프랑스의 처절한 상호 적대의 역사를 목도한 사람들은 오늘날 유럽연합(EU)이 구성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원자탄과 가미가제특공대를 동원하면서까지 서로를 괴멸시키려했던 미일관계가 오늘날처럼 지구상에서 가장 가까운 동맹관계로 발전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최근에는 미국과 베트남이 중국의 패권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전면적인 군사협력에 합의했으며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침략과 포로에 대한 가혹한 대우에 분개했던 호주가 일본과 안보협력에 관한 공동선언을 체결했다.
서로 죽느냐 사느냐했다가도 가장 가까운 동맹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 국제관계다. 그러므로 한일간의 과거사문제도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 아니다. 물론 과거만 생각한다면 그들에 대한 우리의 뼈에 사무치는 원한은 어떤 면으로 보더라도 불구대천(不俱戴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가혹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국제사회에서 우리는 계속 과거의 감정에만 집착하고 있을 수는 없다. 양국(특히 한국)이 좀 더 현명해 지고자 한다면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향해 눈을 떠야 한다.
한국은 장차 중국의 부상에 대해 독자적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다른 국가를 이용해 힘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다고 영국이나 프랑스 등 한국과 멀리 떨어진 과거의 강대국들과 동맹을 맺어 본들 그것이 한국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따라서 한국의 대 중국전략은 지난 반세기 동안 실질적인 동맹관계를 지속해오고 있는 한미일 삼각동맹체제를 통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미국과 동맹관계에 있는 한국과 일본이 상호 동맹을 체결하면 그 힘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질 뿐만 아니라 일본의 잘못된 야망을 견제하는데도 매우 유용하게 작용할 것이다.
이 때문에 우호적인 한미일관계의 발전은 불가피하며 우선 가장 중요한 안보부문에서 미국을 매개로 했던 간접적이고 소극적 군사협력관계에서 과감히 탈피해 한일 양국간 지속돼 온 적대적 동맹관계를 청산하고 양국의 국민정서를 고려하여 시간을 가지고 점진적으로 추진하되, 최종적으로는 기존의 한미일 동맹체제에서 "동맹의 약한 고리"에 해당하는 일본과 한일간 상호방위조약을 통한 직접적인 안보동맹체제로 발전시켜 '한미', '미일', '한일동맹' 등 안정된 '한미일 삼각안보동맹'의 기본 틀을 완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확고한 안보적 일체화를 이룩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중국의 급성장으로 인한 거대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고 이를 통해 동북아에서의 세력불균형을 억제함으로써 최종적으로는 동북아의 안정을 기반으로 하는 한국·일본 그리고 중국을 연결하는 실질적 평화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한일동맹을 주제로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중요한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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