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6·15 공동선언 이후 남북관계가 진전됨에 따라, 북한을 주적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이제 한국에서 비주류로 밀려나고 있다. 대체적인 분위기를 볼 때, 한국의 젊은 장교들 사이에서도 북한에 대해 객관적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주적 자리가 '공석'이 되자, 누구를 안보상의 주적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심심찮게 제기되고 있다. 수구세력은 여전히 북한을 주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중국과 일본 중 한 나라를 미래의 주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인식도 나타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약 1개월 전에 관련 서적 1권을 저자로부터 직접 선물로 받은 적이 있다. 여의도에 갔다가 만난 군사 평론가 신우용씨로부터 <한미일 삼각동맹>이란 책을 건네받았다.

유사한 분야에 관한 글을 쓰기 때문에 필자와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는 신우용씨는 군대에서 군단장·군사령관·국방장관 등을 보좌한 후에 청와대 경호실 등에 근무하다가 지금은 국회의원 비서관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책을 받아든 순간, 그 제목의 '도발스러움'에 상당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십여 년 전 같으면 상식적인 책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요즘처럼 미국·일본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 세상에 한미일 동맹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책을 받아들고서 황당한 느낌을 그저 웃음으로밖에 무마할 수 없었다.

한국을 가장 많이 위협한 나라는 중국

책을 통해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향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한국이 미국·일본과 동맹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을 견제해야 하는 이유로서 저자가 제시한 것은, 중국은 전통적으로 한반도를 위협해 온 나라라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한반도를 가장 많이 위협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미·일과 동맹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책이 안보문제와 관련하여 한국 내 주요 문헌들을 체계적이고 흥미 있게 정리했고 또 군인 출신의 저자가 북한이 아닌 중국의 위험성을 지적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더라도, 이 책이 갖고 있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위험성에 대해서는 경계의 시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이 책의 저자를 어느 정도 알고 있기는 하지만,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독자로서 솔직한 느낌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한국이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저자의 지적은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필자도 동감하고 있다시피 역사적으로 볼 때에 한국을 가장 많이 위협한 나라는 바로 중국이며 또 일본이 한반도를 위협한 시간은 '불과' 백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미국·일본에 대한 한국인으로서의 응어리를 일정 정도는 억눌러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일본이 안겨준 고통은 '현재진행형'

하지만 한국과 일본은 그냥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다. 일본은 저 멀리 유럽의 네덜란드나 스페인처럼 허물없이 대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일본은 최근까지 우리 민족에게 고통을 안겨 준 나라이며 일본이 준 고통은 아직까지도 청산되지 않고 있다.

"몽골도 고려에게 고통을 줬고 청나라도 조선에게 고통을 줬는데, 왜 유독 일본에 대해서만 뭐라고 하느냐?"고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물론 몽골과 중국이 과거에 우리 민족에게 고통을 안겨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몽골과 중국이 안겨준 고통은 현재 한국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일부를 이루고 있지 않다. 그것은 '과거의 고통'이며, 이제는 우리의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들로부터 사과를 받아내려 할 게 아니라 다시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경계하면 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일본이 안겨준 고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비록 일본제국주의가 물러가고 중앙청도 허물어졌지만, 일본이 안겨준 고통은 여전히 '현재의 고통'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제까지 일본은 미국의 비호 하에 과거 죄악을 청산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었다.

일본제국주의의 피해를 본 정신대 할머니들의 한이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일제 지배의 유산인 민족분단이 아직까지도 해소되지 않았는데 그 일본과 정식으로 동맹을 체결하자고 한다면, 중국의 위험성을 아무리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선뜻 거기에 동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나라'와 동맹을 체결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과거에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준 나라'를 견제하자고 한다면, 이는 논리적으로도 타당성을 갖기 어려울 것이다.

한일동맹이 가능하려면 일본이 과거의 죄악을 정리해야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한국이 언제까지나 일본과 적대적이 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미일 삼각동맹>의 저자가 강조했듯이, 중국은 정말로 강력하고 위험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하에서 한일동맹은 가능한 것일까?

그 해답은 이미 나와 있다. 일본이 과거의 죄악을 정리하는 것이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죄악을 정리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이 일본과 동맹을 체결하려고 한다면, 한국은 그야말로 '못난 놈'이 되지 않을까? 자신에게 해악을 끼친 사람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가해자와 손을 잡고 걸어 다닌다면, 이는 자신을 바보라고 선전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위 책의 저자가 갖고 있는 인식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인 신우용씨는 이 책 359쪽에서 "한국의 반일주의자들은 일본이 한 번도 자국의 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제대로 된 사과를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면서 히로히토 일왕과 역대 총리의 사과를 예로 들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과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행동이 수반되지 않으면 무의미한 것이다. 남의 물건을 빼앗았다면, 단순히 말로만 사과할 게 아니라 빼앗은 물건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 또 남의 신체에 상해를 입혔다면 말로만 미안하다고 할 게 아니라 치료비 등의 손해를 배상해야만 진정한 사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본은 어떠했는가? 일본은 포괄적이고 형식적으로 과거 잘못을 사과했을 뿐, 개별적 사안과 관련하여서는 자국의 잘못을 철저히 부인하고 있다. 수십만 명의 목숨이 희생된 남경대학살과 관련하여서도 일본은 "우리는 안 했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남과 동맹하기 전에 먼저 나를 바로 세워야

박정희 정권이 일본으로부터 받은 '그 알량한 배상금'을 다른 나라들은 그나마 받지도 못했다는 사실은, 일본이 얼마나 피해배상에 인색한 나라인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제대로 피해배상도 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사과한다고 일본의 잘못이 없어지겠는가? 또 일본이 가난한 나라라면 모르겠지만, 일본은 배상금을 다 내고도 충분히 잘살 수 있는 세계적인 부자 나라다.

이처럼 일본이 과거의 잘못에 대해 제대로 된 반성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피해자들을 우롱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하에서 한일동맹의 필요성을 제기한다면, 책을 읽는 독자로서는 의아함을 감출 길이 없을 것이다.

국내 관련 문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신우용씨의 저서가 훌륭한 참고문헌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일본의 사과가 전제되지 않는 상태에서 한일동맹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적 자리가 공석이 됨에 따라 누구를 주적으로 할 것인가에 관한 사회적 논의는 앞으로도 계속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를 전개함에 있어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남과의 동맹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도 바로 세우지 못한 상태에서 남과 동맹을 체결한다면, 이는 나 자신을 허물어뜨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남과의 관계까지도 저해하는 일이 될 것이다.

나에게 모욕과 수난을 가한 자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도 받지 못할 정도로 '못난' 사람이라면 남과 동맹을 체결할 자격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의 자화상이 바로 그러하다.

그러므로 비어 있는 주적 자리를 성급하게 채우려 하기보다는, 주적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나 자신의 역량을 정비하는 일이 급선무일 것이다. 우리 민족이 내실을 강화한다면, 주적 자리는 어쩌면 영원히 공석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한일동맹#삼각동맹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