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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설 때 기차를 타고 서울에 다녀왔다. 고속버스 표가 매진됐거나 대관령에 폭설이 내려서가 아니라 괜히 멋 한 번 내보고 싶어서였다. 사실 멋이란 이유를 단 것에는 몇 가지 사연이 숨어 있었다. 명절 때마다 같은 시간대에 나는 서울로 가고 친구들은 고향으로 오니 수 년 동안 술 한 잔 할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초저녁에 친구들과 술 한 잔 나누다 심야열차에서 잠자며 귀경 하면 일석이조가 아니냐는 게 그 첫 번째였다. 둘째는 쉰 살 넘게 살아 온 세월을 새해 벽두에 반추해보고 올해 설계도 한 번 멋지게 해보자 작심했다.
그러나 30년 만에 타보는 기차는 모든 게 생소했다. 심야열차여서 일까. 텅 빈 역 대합실이며 두서너 명밖에 안 되는 승객과 열차에 올라 좌석번호도 확인할 필요 없이 아무 자리나 덜컥 앉으니, 꼭 실패한 사람이 명절 날 아침 귀향하는 기분처럼 썰렁하기조차 했다. 또 레일과 바퀴에서 철커덕 철커덕거리며 반복되는 소리가 지독한 소음으로 들려 얕게 든 잠을 몇 번이나 깨웠다. 도착을 알리는 역 안내 방송도 먼 이국땅에서 알 수없는 말로 듣는 것처럼 생소했다.
괜한 멋을 부렸다는 후회가 앞 설뿐 작심한 반추나 설계 따위는 차창 밖 정경처럼 빠르게 지나갔고, 청량리역에 도착했을 땐 피곤만이 남아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고향을 지키는 차남이 겪는 연례행사였다. 매번 자괴지심이 생겨났었지만 혹여나 '기차여행'이라는 이벤트로 이번에는 사라지나 기대했었지만 역시 몸이 피곤해 짜증만 더 부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었다. 정작 명절이 끝난 후 '기차여행'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친구들이며 동료들이 그 여행의 속사정을 듣고 싶어 했다. 먼저 상식이 통하지 않은 여행이라 의문을 달았다. 네비게이션이 달린 자가용을 끌고 가족 전부랑 여행 삼아 다녀와야지 왜 혼자 달랑 다녀왔는가, 또 고속버스를 타면 휭 하니 세 시간 반이면 도착할 길을 굳이 몇 시간이나 더 걸리는 무궁화호를 타고 간 연유가 뭐냐?
그들은 내 대답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평소에 생각지도 못한 기차로 서울을 다녀왔다는 데 의미를 두었다. 그들은 또 기차가 우리들 생활에 필수일 때를 회상하고 저마다 추억에 빠져 기적소리마냥 큰 소리로 열 내 떠들었다. 나 스스로도 그런 멋을 부렸다는 게 점차 대견스러워졌다. 다들 기차 타 본 지 30여 년이 넘은 사람들이었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지만 그 시절 특히 우리 영동지역과 탄전지대의 교통수단은 철도가 전부였다.
60년대 초반과 80년대 초반까지 영동선은 말 그대로 우리나라 산업 활성화의 중추역할을 했다. '개도 100원 짜리 지폐는 안 문다'라 할 만큼 호황이었던 탄전지대에 영동지역 사람들은 기를 쓰고 농산물과 어물을 완행열차에 싣고 팔러갔다. 그때 당시 우리집은 과수원을 했었다. 가장 큰 고객은 탄광촌인 도계역전 도매상이었다. 그들 마음에 들려면 첫 기차에 어김없이 실어야 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리어카에 사과 상자를 가득 싣고 역 소화물 취급소까지 얼마나 운반했던가.
도계 출신 김씨도 기차여행 소리를 듣고 찾아왔다.
"거, 왜. 도계역 지나 나한정까지 갔다가 다시 뒤로 가는 지그재그 철로가 그대로 있어?"
"어쭈, 그걸 다 기억하네. 그럼 아직 있더라."
"내 그 밑 동네 흥전 출신이잖아."
"그럼, 공중으로 운반하던 소래차 연탄가루도 많이 뒤잡아 썼겠네?"
"하이코, 말도 말게. 아직도 내는 눈이 검게 보일 때가 있다."
"허풍은? 그럼, 심포역에 내려 통리역까지 걸어간 거는 기억나나?"
"예끼, 이 사람. 그건 지금 환갑이 넘은 사람만 기억할 거야. 난 말만 들었지."
"반시간 넘게 산길을 헉헉대며 뛰었다며?"
"그럼. 그래야 통리역에서 기다리는 열차에 좌석을 잡을 수 있었거든."
"그때 짐이나 아이들 태워주는 지게꾼이 돈 좀 벌었다는데?"
"그럼, 우리 아버지가 거 출신이야."
"참, 그 스위치백이 없어진다며?"
"동백산에서 도계까지 터널을 뚫고 직선화하는 공사가 지금 한창이래."
"약삭빠른 시의원이 그 일대를 관광자원화 하자고 제안한 상태라던데?"
"하기사,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인 스위치백이잖아. 정선에서 레일바이크로 돈 많이 번다 하잖아?"
"그건 그렇고. 기차 타니 첫사랑이 떠올랐어?"
"예끼, 이 사람. 술 먹고 한 소릴 믿다니?"
첫사랑? 극구 반대했지만 사실 기차를 탄 의도 중 가장 큰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1980년 그 해 봄은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 시국이었다. 1979년 10·26 이후 불어 닥친 민주화 바람은 '서울의 봄'으로 이어졌고 4월 하순에는 이웃 마을인 사북에서 엄청난 사회적 혼란을 야기한 '사북사태'가 벌어졌다. 이어 5월 18일에는 '광주민중항쟁'이 전국을 강타했다. 그러나 나는 시국과는 상관없이 겨우 술자리에서 어용노조를 빈정거리는 공장 노동자일 뿐이었다. 게다가 어울리지 않게 짝사랑 열병을 앓고 있었다.
동네후배를 형이라 부르는 여대생이 그 주인공이었다. 여대생은 대학도 안 가고 고향에 있는 공장에 다니는 내가 안됐는지, 아니면 후배에게 술을 잘 사줘 고마웠는지 나를 소위 의식화시키기 위해 금서를 선물했다. 김지하의 시를 일일이 복사해 비닐 표지로 감춘 <황토> 라는 시집과 리영희의 <우상과 이성>, 체 게바라의 자서전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책들을 열심히 읽어 의식화되기보다는 여대생의 따뜻한 마음을 확대 해석해 짝사랑까지 승화시켜 버렸다.
후배가 군대에 갔고 여대생은 졸업을 했다. 후배가 첫 휴가를 나오자 중국집으로 데려가 군만두와 자장면을 시켜 놓고 고량주를 마셨다.
"나랑 기차여행 가자!"
"좋아, 형. 황지까지 갑시다. 거기에 형도 잘 아는 후배가 여고 선생으로 발령 받았거든."
우리는 그때 유행하던 '동해백주'란 술을 열차 안에서 마시기 시작했다. 그 술은 요새 말로 '같기도술'이었다. 고량주도 아닌 것 같고 소주도 아닌 것 같은 도수 30도인 술이었다. 붉은 색 바탕의 광고지에는 요염한 여자 모델이 표범 가죽으로 만든 브래지어와 팬티를 입고, 화살을 당기는 폼으로 누군가를 견주며 노려보았다. 비스듬하게 쓰인 카피에는 "사나이 가슴에 불을 당긴다!"라 쓰여 있었다.
우리는 열차에서 가슴에 불을 너무 당긴 탓인가. 황지역에 내려서도 한참이나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여대생 아니 짝사랑 여선생을 만나서도 "나, 너 다르게 생각했다. 미안하다. 안녕!"이란 말도 못하고 검은 시가지만 바라보았다. 어쩌면 진짜 연인이었을 두 후배 틈에 끼어 바보처럼 피식 피식 웃기만 했다.
기차여행은 추억여행이었다. 또 꿈을 꾸게 해주었다. 쉰밥 할 때 그 쉰 살이 넘자 지나온 모든 것이 그립기 시작했다. 여태껏 질주만 해오지 않았던가. 간이역을 지나치는 열차처럼 조금은 천천히 지나고, 스위치백을 오르내리는 열차처럼 지난 시절을 반추도 해보고 싶다. 무엇보다도 기적소리를 듣고 싶다. 무덤덤하고 아무 맛도 없는 나날에 어린 시절 나를 몇 번이고 깜짝 놀라게 한 기적소리를 쉰 살이 넘은 이 즈음에 다시 듣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철도와 함께하는 여행>에 응모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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