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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 충청도인 시댁 제사에는 전을 참 간단하게 부친다. 두부 전, 명태포 전, 호박 전, 고구마 전, 그리고 세 줄기 파전 등 몇 가지만 부친다. 그중에 허연 밀가루만으로 석 장은 꼭 부쳐야 한다. 그 밀가루 전은 석 장을 한꺼번에 돌돌 말아 2cm 간격으로 썰어 제사상에 올리는데, 그것은 먹고 남은 음식을 짊어지고 가라는 '멜빵'이라고 했다.

세 며느리 중에 전을 부치는 담당은 항상 나인데, 그 밀가루 전을 부칠 때마다 나는 여기에 설탕만 뿌리면 딱 '꾸붕떡'이지 하며 어린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한여름의 태양이 이글거리는 정오, 나는 뜨겁게 달구어진 검정 고무신을 멋모르고 신다가 '앗 뜨거' 하며 마당으로 냅다 집어던지고, 우물가에서 빨래를 주무르던 엄마는 "그새 점심때네 오늘은 또 뭐 해무꼬" 하시며 일어나신다. 엄마의 숙제는 늘 점심거리였다.

농촌에 살았어도 농사지을 땅 한 뙈기 없던 우리 집은 할아버지가 주시는 조금의 쌀로 양식을 대신 했는데, 일곱 식구의 양식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땅이 있다 하더라도 부지런한 농사꾼이 되지 못하는 아버지는 농사를 제대로 지울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고, 그런 아버지를 믿지 못한 엄마는 학교 앞으로 난 담장을 허물어 구멍가게를 차렸다.

도시에서 살았던 엄마도 힘든 농사일을 못하기는 매한가지라 생각해 낸 것이 그것이었는데, 시골의 작은 초등학교 앞에서 아이들의 코 묻은 돈 10원짜리를 상대하는 장사가 높은 수익을 가져다줄 리는 만무하고, 그저 올망졸망한 다섯 자식을 키우기에 급급한 형편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늘 점심을 밥 대신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으셨고, 아버지가 중대장인 옆집 한희 언니네는 새참으로 먹는 감자나 고구마를 우리는 점심대용으로 삶아 먹었다.

때로는 김치와 굵은 멸치를 넣어 끓인 국물에 찬밥을 넣어 푹 끓여 양을 두 배로 늘린 밥국(그것을 우리는 '국밥'이 아니라 '밥국'이라고 불렀음)도 해 주셨고, 줄줄 흐르는 땀에 매운 연기를 마셔가며 수제비도 끓여주셨고, 또 불린 콩을 맷돌에 갈아 콩죽도 끓여 주셨다.

우리 엄마는 그렇게 없는 살림에서도 아이들에게 먹이는 것에 관한 한, 참 부지런한 분이셨다. 쌀을 대신해 배불리 먹일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아 늘 동분서주 하셨으니까.

엄마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꾸붕떡'... 입에 착착 달라붙는 그 맛이 그립다!

▲ '꾸붕떡'. 딸아이가 글을 보고 맛이 궁금하다고 해서 부쳐 보았습니다.
ⓒ 서미애
그 중,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입에 착착 달라붙는 맛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꾸붕떡'이었다.

당시는 설탕이 아주 귀할 때라 단맛을 내려면 소금알갱이 같은 사카린을 사용했다. 그런데 어쩌다 가게 물건을 하러 가신 엄마가 꼭 필요할 때만 쓰려고 설탕 한 봉지라도 사올라치면, 우린 엄마 치마 꼬리를 붙들고 "엄마 꾸붕떡해조, 꾸붕떡해조" 하며 졸랐다.

빙 둘러앉은 다섯 명에게 배불리 먹이려면 설탕이 약간 드는 게 아니라서 엄마는 자꾸만 미루다가, 길고 긴 여름 햇살에 절인 배추처럼 축 늘어진 우리가 애처로운 날은 큰맘을 먹고 감나무 그늘에 숯불 풍로를 피우셨다.

들어갈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밀가루에 물만 부어 묽은 반죽을 한 다음, 식용유를 아끼려고 겉껍질을 벗겨낸 짚을 둘둘 말아 만든 솔에 식용유를 찍어 프라이팬에 바르고, 반죽을 한 국자씩 떠 얇게 폈다. 앞뒤로 뒤집어가며 노릇노릇 다 익어 갈 때쯤이면 설탕을 골고루 펴 발라 길게 네 번 접어 낸다.

이것이 바로 우리끼리 통하는 이름의 '꾸붕떡'인데, 달착지근한 그 맛이 지금의 호떡 맛과 비슷했다. 뜨거운 풍로 앞에 앉은 엄마의 이마에선 연방 땀이 흘러내렸고, 그 앞에 빙 둘러앉은 우리 다섯 남매는 엄마의 마술 같은 손놀림에 그저 침을 질질 흘리며 열 개의 눈동자가 반들거렸다.

한쪽이 부쳐지면, 서로 먼저 달라고 입을 쫙쫙 벌리는 처마 밑의 제비새끼처럼 손을 넙쭉넙쭉 벌려 보지만 엄마는 다섯 조각이 다 구워지기를 기다려 그런 아우성이 없도록 공평하게 한쪽씩을 나누어 주셨다.

그것은 누룽지를 긁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누룽지 긁는 소리를 먼저 듣고 한 조각이라도 더 얻어먹으려 동생들 몰래 살금살금 나가보지만, 엄마는 정확하게 다섯 뭉치를 만들어 솥뚜껑 위에 얹어 두셨다.

그래서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서로 똑같이 나누어 먹는 공평한 분배법을 엄마로부터 배웠고, 꿀물 같은 설탕물이 뚝뚝 떨어지는 꾸붕떡을 하나씩 받아든 우리는 마냥 행복했었다. 손등 위에도, 가슴팍에도, 자꾸만 흘려 내리는 꿀물을 긴 혀로 싹싹 핥아먹고, 입술에 묻은 단맛 하나까지도 쪽쪽 빨아 먹었었다.

먹을 것이 없었고, 좀처럼 설탕 맛을 볼 수도 없었던 그때 그 시절. 감나무 그늘 밑에 다섯 장의 찔레꽃잎 같은 오남매가 옹기종기 둘러앉아 먹던, 엄마의 사랑까지 솔솔 뿌려져 더 달콤했던 그 꾸붕떡 맛이 아직도 입술에 남아 있을까 하여 가만히 입술을 빨아먹어 본다. 밍밍하다.

덧붙이는 글 | 방송에도 보냈습니다.


#꾸붕떡#다섯남매#설탕#엄마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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