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며칠 전 우리 집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사)생명평화 마중물 사람들입니다. 문규현 신부님을 비롯해 서울, 대전, 전주, 인천에서 여러분들이 오셨습니다. 우리 집에 있는 가지가지의 탁자와 의자들을 총동원해 저녁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집에서 기른 채소와 가마솥에 펄펄 끓인 감자탕과 떡을 준비했는데 식탁은 그 이상으로 푸짐했습니다. 어떤 분은 과일이며 수육을 준비해 오셨고 또 어떤 분들은 막걸리에 맥주와 오량예라는 술까지 준비해 오셨습니다.
(사)생명평화 마중물은 그 삶터가 있는 전북 부안에서 주로 모임을 하는데 가끔 회원들 집을 돌아가며 만나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서울과 부안의 중간쯤에 자리한 우리 집에서 모이기로 했던 것입니다. 정기적으로 날짜를 정해 놓고 만난 것도 아니었고 반드시 참석해야 할 의무 사항도 없었습니다. 그냥 시간 나는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우리 가족이 마중물 식구가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겨울, 서울 모임에 참석했다가 얼떨결에 마중물 식구가 된 것입니다. 그날 회원도 아닌 나는 이웃사촌인 정한섭씨의 손에 이끌려 농사에 대한 얘기를 함께 하자는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나처럼 대부분 초보 농사꾼들이었기에 큰 부담은 없었지만 본래 낯선 자리에 서면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촌놈이었기에 무척 힘든 자리가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날 마중물 사람들은 "어디에 살든, 직업이 무엇이든, 모두가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키우는 농부의 정신, 농부의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함께 했습니다.
문규현 신부님과 더불어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키우는 데 힘을 쏟고 있었기에 한동안 세상일에 등지고 살아온 나로서는 여러모로 빚진 기분이 들어 부담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나는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규현 신부님의 걸어온 길이 그러하듯 마중물이라는 모임이 뒤틀린 세상을 바르게 되돌려 놓겠다는 어떤 심각한 대화들이 오고갈 것이라 지레짐작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내 예상은 크게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절망적인 농촌현실을 바꿔보자는 어떤 '결의에 찬' 얘기도 없었습니다. 심각한 대화보다는 가벼운 대화들이 더 많이 오고 갔습니다. 무엇보다 실천이 중요하니까요. 거기다가 어린아이처럼 회원들 사이를 기웃거리고 다니며 커피 잔을 나르는 신부님의 격의 없는 모습에 비로소 긴장된 마음을 풀어 놓을 수 있었습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나 자신조차 예상치 못하는 말들이 툭툭 튀어나오곤 하는데 그날도 역시 느닷없이 손을 번쩍 들고 말았습니다.
"저기요, 회원 가입은 아무나 할 수 있남유?!"
다들 박장대소로 신입회원을 환영했지만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마 내 얼굴은 홍당무처럼 발갛게 달아올랐을 것입니다.
토요일 오후, 우리 집에 느지감치 찾아온 마중물 식구들은 닭장도 둘러보고 장독대와 앵두나무가 삼삼하게 서 있는 집 뒤 뜰이며 채소밭을 둘러봤습니다. 며칠 전부터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음식을 장만하면서 마냥 들떠 있던 아내는 도시에서 버림받은 재활용물품으로 꾸민 집 구석구석을 자랑스럽게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농사일에 관심이 많은 신부님은 풀과 채소들이 공존하는 밭을 둘러보며 평화성당 옥상에다가도 자그마한 채소밭을 꾸밀 예정이라고 합니다. 단순히 좋은 먹을거리를 직접 가꿔 먹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 지열, 태양열 등 지구온난화를 극복할 수 있는 대체 에너지에 관심을 쏟고 있는 신부님. 옥상에 채소밭을 가꾸게 되면 겨울에는 찬 기운을, 여름에는 더운 기운을 차단시켜 에너지 낭비를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밭으로 호남고속철도가 지나갈 예정이라고 했더니 마중물 식구들은 자신의 일처럼 걱정들 하십니다. 저녁 식사를 할 때도 그 걱정을 놓지 않았습니다.
마중물 식구들과 만날 때마다 순간순간 나 자신이 낮아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낮아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입니다. 마중물 식구들은 자신을 낮춰 상대를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편한 마음이 드니 당연히 낮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기분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얼마 전에는 채소 한 꾸러미를 들고 문규현 신부님이 계신 전주 평화성당에 찾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사무처에 계신 분들 말에 의하면 이틀 내내 열린 바자회로 반쪽이 됐다는 신부님. 우리 가족이 터 잡고 농사지을 만한 터를 알아봐 주신다며 그 피곤한 몸에도 마중물 삶터가 있는 부안으로 안내해 주셨습니다. 더구나 내 자동차 마다하고 끝내 신부님 자신의 차를 모셨습니다.
부안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여전히 운전대를 놓지 않고 내가 공주로 돌아가는 찻길이 막힐 것을 미리 예상해 부러 평화성당으로 가는 지름길 놔두고 먼 길로 돌아왔습니다. 공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지름길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였지요. 거의 반나절에 걸쳐 운전대를 놓지 않으셨지만 피곤한 기색이 없어 보였습니다.
"신부님 피곤하지 않으세요?"
"괜찮아요. 움직이니까 이제 좀 피로가 풀리는 것 같네요."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시죠?"
"…비우니까요."
비운 자리에 하느님 기운이 채워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만금에서 서울까지 삼보일배도 그렇게 비워 나가셨다 하십니다. 나는 비우면 채워진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고 있지만 신부님이 삼보일배를 할 때 그저 눈시울만 붉히고 있었듯이 정작 말만 앞설 뿐입니다. 신부님 앞에서는 그저 채우기 위해 적당히 비워 나가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낮은 자세로 반겨주시는 신부님과 헤어지면서 신부님의 비움은 낮은 자세에서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나는 아직도 마중물의 창립 취지문을 꼼꼼하게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마중물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동안 내가 만난 마중물 회원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다만 마중물은 낮은 자세로 생활하시는 문규현 신부님처럼 그런 마음자리를 갖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닐까, 라는 짐작만 해볼 뿐입니다. 또한 마중물이 내세우고 있는 생명 평화는 거기 낮은 곳에서부터 움트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집에서 모임을 했던 그날도 역시 심각한 얘기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저녁 식사와 더불어 술 한 잔씩 나누면서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당 한가운데에 모깃불을 피웠습니다. 말린 쑥대와 금방 베어온 쑥대를 섞어 모락모락 쑥향 진한 모깃불까지 피웠습니다.
별이 총총한 늦은 밤, 모깃불 앞에 둘러앉아 '마중물의 가수' 정한섭씨의 통기타 연주에 맞춰 기분 좋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만 쏙 빼놓고요.
나는 그날 밤 촌놈티를 내고 말았습니다. 푸짐한 음식 앞에서 이것저것 식탐을 즐기다가 그만 배탈이 나 끙끙거리며 방안에 누워 노랫소리를 들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밤하늘에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는 아픈 배를 가라앉힐 만큼 평화로웠습니다.
그 평화로운 마음자리를 안고 저마다의 삶터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다들 삶터로 돌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 평화의 기운을 나눠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운동'에 지친 사람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아이들에게 생명과 평화의 기운을 심어 주고자 대안학교를 준비하고 있는 마중물, 마중물은 그런 마음자리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음날 아침나절에는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지낸 몇몇 마중물 식구들과 함께 모내기를 했습니다. 비록 300평에 불과한 천수답이지만 아내와 둘이서 손 모내기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막막했는데 큰 힘이 돼주었습니다. 마중물 식구들이 모두 다 떠나고 나자 아내가 불쑥 그럽니다.
"어젯밤에 마당에서 노래 부르다가 밤하늘에 별을 보면서 사람들과 헤어질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 같더라구."
우리 가족은 1년도 안 된 신입회원이기에 마중물 사업에 대해 잘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평화'였습니다. 좀 더 많은 사람이 '마중물'이 되어 '생명과 평화'의 물을 퍼올릴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는 이제 생명과 평화의 작은 씨앗을 뿌릴 것입니다.
이 씨앗은 함께 하는 많은 사람들의 정성어린 손길을 거름으로 아름답게 자라나
온 누리를 덮어갈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가 시작하는 일은 새로운 하늘과 땅을 여는 일이 아닙니다.
찌그러진 곳을 펴고 떨어져 나간 곳을 다시 붙여
처음의 하늘과 땅으로 돌려놓으려는 일입니다."
- 생명평화 마중물 창립취지문 중에서
덧붙이는 글 | 메마른 펌프에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한 바가지 정도의 물이 필요합니다. 이 물을 부으면서 펌프질하면 저 밑에 고여 있는 샘물이 솟아오릅니다. 이때 붓는 첫 물을 마중물이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