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이 결국 열리게 됐다.
정부는 19일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서 권오규 경제부총리 주재로 관계부처 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미국 쪽이 제기한 FTA 추가협상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미국과 FTA 추가협상 결정을 내린 것은 처음이다. 정부는 그동안 '재협상'이라는 말 대신 '추가협의'라는 말을 써왔다.
뒤늦게 정부가 미국과 추가협상을 선언함에 따라 이를 둘러싼 논란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특히 그동안 미국 일정에 짜맞춰 졸속 협상 지적을 받아온 한국 협상단은 이번에도 미국의 일방적인 협상 요구를 수용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재협상인가, 추가협상인가
정부는 이날 미국과 재협상을 공식 결정하면서도 '재협상'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 대신 '추가협의'라는 말을 사용했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쪽 고위 관계자는 "재협상이든 추가협의든, 용어가 그리 중요한가"라고 반문하고, "중요한 것은 미국이 먼저 FTA 협정문 수정 등을 요구한 것이고, 우리는 상대적으로 급할 것이 없는 상황에서 이익을 극대화하면 되지 않나"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미국 쪽 요구 내용은 이미 지난달에 미 무역대표부에서 발표한 부분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서도 "다만 투자자-국가소송에서 안보를 거론한 부분이나, 정부조달 일부 부분에선 미국 쪽 요구 배경을 면밀하게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관계자의 말처럼 이번 협상이 그리 간단치는 않다. 미국 쪽 요구 내용은 단순하게 협정문을 추가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노동과 환경, 투자와 정부조달 등에선 협정문 보완을 넘어 일부 조항을 아예 없애거나 수정해야 한다. 사실상 '재협상'에 가깝다.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는 "이미 한미 간 재협상은 오래전부터 물밑으로 진행돼 왔다"면서 "이미 많은 것을 얻어간 미국은 다시 민주당을 등에 업고 추가적인 양보와 이익을 얻으려고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관세혜택 철폐하는 무역보복' 부담
미국이 이번에 내놓은 제안은 이미 지난달 미 의회와 행정부가 합의한 '신통상정책' 대부분을 담았다. 미 무역대표부의 자문위원회가 제안한 내용도 일부 들어갔다. 세부적으로는 노동과 환경·의약품·안보·정부조달·항만안전·투자 등 7가지 분야다.
이 가운데 가장 민감한 부분은 노동 쪽이다. 미국에서는 국제노동기구(ILO)의 1998년 선언에 들어있는 결사의 자유 등 8가지 핵심 내용을 협정문에 넣자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 쪽 요구대로 될 경우, 국내 노사 관계에 큰 변화가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 그동안 논란이 됐던 공무원 노조 가입이나 파업권 인정, 기업 복수노조 허용 등이 협상테이블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노동·환경 관련 협정을 위반할 때 적용하는 분쟁해결절차 수정은 미국 쪽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
기존 협정문에는 특별분쟁해결절차를 밟아서 위반한 나라에 과징금을 부과하고, 제도개선에 사용하도록 한다고 돼 있다. 이것에 일반분쟁해결절차를 적용하자는 것이 미국 요구다.
이렇게 되면, 위반한 나라에 대해 FTA 체결에 따른 관세혜택을 철폐하는 것과 같은 무역보복도 가능하게 된다. 우리로선 아무래도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안보에 대한 일방적 해석도 눈에 띄어
또 있다. 미국은 환경 분야에서는 '멸종위기 야생 동식물종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 등 7개 다자간 환경협약의 이행을 협정문에 넣자고 요구했다.
하지만 환경 관련 국제협약 가운데 '지구 온난화 방지를 위한 교토의정서'나 '생명안전의정서에 관한 협약' 등, 다른 국가들은 가입했지만 미국만 자국 기업의 이익을 위해 가입하지 않고 있는 협약들은 이번 제안에서 빠져 있다.
또 국내에서 논란이 컸던 투자자-국가소송제에서 미국은 '필수적 안보'에 대해선 예외조항을 인정하자고 나섰다. 9·11 테러에 따른 미국 내 안보상황을 FTA에도 반영하자는 것이다. 문제는 '안보'의 개념이 너무 포괄적이고, 미국의 자의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밖에 미국투자자의 역차별 금지선언 규정 등이 그대로 채택될 경우 미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협정문이 바뀔 가능성도 크다.
이해영 교수는 "이미 지난번 협상에서 막대한 이득을 얻어간 미국에서 노동과 환경, 안보문제와 정부조달·투자 등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익의 균형을 맞추겠다"... 정말?
재협상은 오는 21일부터 이틀 동안 서울 세종로 외교통상부 청사에서 열린다. 미국 쪽에선 낯익은 웬디 커틀러 한미FTA 미국 쪽 수석대표와 협상팀이 참석한다.
정부 쪽에선 일단 이날 회의에서 미국 측의 제안 내용과 의도 등을 면밀히 검토하겠다는 방침이다. 또 충분한 시간을 두고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외교통상부 한 관계자는 "협상은 당사자가 있는 만큼 한쪽(미국)의 일방적 요구를 수용할 수 있겠는가"라며 "이익의 균형을 맞춘다는 정부 방침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정부 쪽에선 지적재산권을 비롯해 전문직 비자쿼터 강화 등을 미국 쪽에 제안할 카드로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동안 미국의 통상 일정에 따라 졸속·퍼주기 협상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협상팀이 이번 재협상에서 얼마나 얻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