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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서 찍은 하낭 산의 모습
ⓒ 김성호

하낭 산의 산봉우리 숫자는 수시로 바뀐다

탄자니아 사바나 초원과 달리 싱기다 주변의 도로는 작은 바위와 돌 구릉이 많았다. 도로 옆에는 해바라기 밭이 끝없이 이어졌다. 1시간 이상 해바라기 꽃이 활짝 핀 도로를 달렸다. 대규모 집단재배를 하는 것으로 보아 해바라기 플랜테이션이다. 해바라기 씨에서 기름을 짜서 팔아 돈을 버는 것이다. 가끔 옥수수 밭도 보였다. 싱기다는 바위와 해바라기의 도시이다.

30여분을 달리자 멀리 커다란 산이 나타났다. 옆 승객에게 물으니 "하낭 산(Mt. Hanang)"이라고 알려준다.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였던 하낭 산은 1시간을 더 달려가서야 산자락에 다다를 수 있었다. 카테쉬라는 지역을 지나면서 하낭 산은 버스 속으로 빨려들듯 가까이 다가왔다.

우뚝 솟은 푸른 산을 보니 시원하다. 그동안 초원과 작은 돌산만 보아왔던 것이다. 아루샤로 가는 길에서 유일한 재미는 하낭 산을 바라 볼 수 있다는 것. 그 외는 정말 끝없이 펼쳐지는 작은 관목과 울퉁불퉁한 언덕길뿐이었다.

하낭 산은 해발 3417m로 탄자니아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이다. 버스가 하낭 산의 밑자락을 벗어나는 데도 30여분을 더 달려야 할 정도로 큰 산이다. 하낭 산은 멀리서 볼 때는 봉우리가 하나이더니 오른쪽으로 끼고 달리면서 90도 각도로 보니 봉우리가 3개로 나타났다. 다시 한참을 달려 180도 옆쪽으로 가니 다시 봉우리가 하나로 보였다. 하낭 산은 이처럼 보는 각도에 따라 봉우리 숫자가 다르고, 산의 모양도 달리 보였다.

버스가 하낭 산을 다 돌 무렵 경찰의 검문이 있었다. "하낭 경찰서(Hanang Police"라는 간판의 검문소가 있고, 여자 경찰관이 차를 세운 뒤 차 안에 들어와 검문을 했다. 역시 승객의 정원초과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탄자니아의 교통경찰은 은제가 버스터미널에서도 그렇고 여자경찰관을 배치한 것이 특색이었다.

하낭 산을 지나자 초원에 붉은 옷을 걸친 마사이족 청년 5명이 막대기를 들고 무엇인가를 쫓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으로 본 마사이족이다. 하낭 산을 벗어나자 다시 험한 산길이 나타났다. 먼지도 차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먼지와 차의 흔들림이 합작으로 나를 괴롭혔다.

▲ 하낭 산의 다양한 모습
ⓒ 김성호

죽음의 경주를 펼치는 아프리카 운전사

우리 차에 앞서 달리던 버스가 먼지를 일으키자 우리 버스 운전사가 화가 단단히 났다. 앞 버스를 앞지르려고 속도를 내자 거의 1m 뒤까지 바짝 따라붙었다. 그러나 좁은 1차선 산길 도로에서 앞 차가 양보하지 않자 앞지를 방법이 없다. 다시 앞 차가 일으키는 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써야 했다.

더욱 화가 난 우리 버스 운전사는 40여분을 앞 차와 쫓고 쫓기는 죽음의 속도전을 펼쳤다. 결국 일이 터졌다. 갑자기 "펑"하는 소리와 함께 버스가 약간 기울더니 속도가 줄어들었다. 앞차는 멀리 달아나버렸다. 버스 타이어가 펑크가 난 것이다.

뒷바퀴여서 다행이지 앞바퀴였다면 험한 산길에서 차가 뒤집혀 큰 사고가 날 수도 있었다.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과속 운전을 하는 운전사를 막지 않았다. 아프리카에서는 모든 것이 운전사 마음대로이다. 승객의 안전보다는 앞 차에 뒤지지 않으려는 운전사의 자존심이 더 중요한 것이다.

산에서는 바퀴를 바꿀 수가 없으니 20여분을 천천히 내려왔다. 바바티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해 버스정류장에서 타이어를 교체했다. 타이어를 교체하고 기름을 넣은 뒤 출발하자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오후 6시 30분이 되었다. 이정표를 보니 아루샤까지 167km 남아 있다.

타이어를 교체한 버스는 험한 비탈길을 다시 씽씽 달린다. 이제는 엉덩이가 자동으로 차의 움직임에 따라 좌석에서 떨어졌다 다시 붙었다 한다. 통제 불가능할 상태로 버스의 요동은 심해졌다. 울퉁불퉁한 비탈길에다 차의 속도가 더해지자 요동의 폭도 그만큼 커지는 셈이다. 이 정도면 '스카이 콩콩' 놀이기구를 타는 것과 진배없다. 뒷좌석에 앉아있던 한 아이는 차가 갑자기 튀어 오르자 몸이 하늘로 붕 떴다 떨어지면서 기겁을 하고 울기 시작했다.

▲ 하낭 산의 다양한 모습
ⓒ 김성호

아프리카 운전사는 타이어 교체의 세계 챔피언

어둠이 짙어오는데도 버스의 속도는 줄어들지 않는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30여분 정도 더 달렸을 때 갑자기 뒷바퀴에서 불꽃이 튀면서 총알소리 같은 굉음이 났다. 산에서 매복하던 반군이 우리 버스에 대고 총을 쏜 것만 같다. 버스의 속도가 급격히 줄었다. 또 다시 다른 쪽의 뒷바퀴 타이어가 펑크가 난 것이었다.

10여분을 타이어가 펑크 난 채로 달리던 버스는 작은 도시의 버스 정류장으로 들어갔다. 음부그웨(Mbugwe)라는 도시였다. 이번에는 타이어를 지탱하는 알루미늄 새시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틀리고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그래서 타이어가 펑크 나면서 불꽃이 난 것이었다.

남자 차장은 플래시를 비추고 운전사는 내려서 차 지붕 위의 타이어를 밧줄로 끌어내려 바퀴를 갈기 시작했다. 이미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데도 능숙하게 바퀴를 교체했다. "연습은 대가를 낳는다"는 고등학교 시절 담임이었던 국어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아프리카 운전사들은 워낙 많은 타이어를 교체하다보니 이제 눈을 감고도 순식간에 교체했다. 승객들을 차에서 내리게 하지 않고서도 타이어 교체에 10여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바바티에서 새로 탄 내 옆의 젊은이는 "내가 타고 가던 버스는 3번이나 펑크가 났다"며 두 번 펑크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다. 이미 어둠은 깊어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암흑이다. 이러다가 오늘 중으로 아루샤에 도착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 하낭 산을 거의 돌아서 찍은 사진
ⓒ 김성호

브래지어에 돈을 감추는 아프리카 여인의 기발한 착상

내 오른쪽의 30대 여자는 타이어 교체하는 동안 바지 주머니에서 한 움큼의 지폐를 꺼내더니 새기 시작했다. 아마도 차림새나 말하는 투를 보니 장사를 하는 것 같았다. 왼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주머니의 지폐는 장사를 해서 받은 돈을 그냥 넣어두었던 것 같다.

가지런히 정리한 지폐를 다시 넣는데, 주머니가 아니라 가슴 사이의 브래지어 속에 넣는 것이 아닌가. 물론 현금은 누구나 은밀하고 비밀스런 곳에 숨기려고 한다. 그런데 브래지어 속에 숨기는 것은 처음 보는 장면이자 기발한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도둑이 강심장이라고 하더라도 돈을 훔치기 위해 여자의 가슴속으로 손을 넣지는 못할 테니까.

서민들의 발인 아프리카 대중교통버스를 타고가다 보면 이런 재미난 장면들을 가끔 볼 수 있다. 지폐를 보관하는 방법도 나라마다 연령층마다 달랐다. 장사를 하는 이 30대 여성처럼 브래지어를 활용하는 기발한 방법도 있지만, 르완다의 40대 아주머니는 머리를 감는 스카프에 지폐를 둘둘 말아서 보관했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나이든 할머니들이 아예 땀범벅이 된 손에 지폐를 꼭 쥐고 있거나, 땀에 돈이 적지 않도록 신문지 조각으로 지폐를 말은 뒤 보관하기도 했다.

버스가 제멋대로 흔들리면서 어둠 속을 달려가자 '지옥행 비밀열차'에 올라탄 느낌이다. 버스 안에 탄 승객들도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버스가 아무리 요동쳐도 잠을 이길 수가 없었다.

잠에 곯아 떨어졌는데 남자 차장이 모두 일어나라고 깨운다. 마침내 종착지인 아루샤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밤 10시 30분을 지나고 있었다. 카하마에서 새벽 6시에 출발했으니 무려 16시간 30분이나 차에 시달린 셈이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엉덩이를 고생시킨 적이 없었다. 정말로 지옥의 도로였고,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지금도 이 길을 생각하면 악몽을 꾼다. 외국인이라고는 나 혼자인 외로운 길이었다. 나는 이런 지옥의 코스를 여행의 마지막 일정인 마다가스카르에서 다시 직면해야 했다.

나는 케냐의 나이로비에 만난 젊은 의사가 추천한 플라밍고 호텔을 찾았다. 방이 모두 차서 없단다. 기진맥진한 나는 여행객 숙소의 카운터 옆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여자 직원이 안쓰러웠는지 직원들이 자는 방을 치울 테니 사용하라고 한다. 너무 피곤해 그대로 잠이 들었다.

▲ 아루샤 국제회의장 팻말
ⓒ 김성호

반인도적 전범의 재판 현장을 가다

다음날 하려던 세렝게티 사파리는 하루 뒤로 미뤄야 했다. 너무 힘들고 피곤했기 때문이다. 아침 늦게까지 잠을 푹 잤다. 오후가 되자 활기를 되찾았다. 나는 역시 젊은 의사가 소개해준 사파리 회사를 통해 3박 4일짜리 세렝게티 사파리를 예약했다. 하루 125달러를 달라는 것을 깎아서 하루 100달러로 했다.

아루샤(Arusha)는 세렝게티 초원에서 사파리를 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여행객들이 몰려드는 사파리의 전초기지이다. 사파리 예약을 끝낸 나는 르완다 대량학살 책임자를 재판하기 위한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ICTR)를 찾아갔다.

숙소에서 우후루 기념탑을 거쳐 왼쪽으로 조금 걷자 국제회의장(International Conference Center) 건물이 나타났다. 그 건물 안에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가 있었다. 인종대량학살을 자행한 전쟁범죄자들을 재판하기 위한 국제사법기구인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는 1994년 11월 유엔 안보리 결의에 의해 설치되었다.

탄자니아 아루샤에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가 설립된 것은 지난 1993년 유엔과 아프리카단결기구(OAU) 등의 중재로 르완다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협상이 이곳에서 진행되어 아루샤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아루샤에는 또한 '인간과 인민의 권리에 관한' 아프리카 법정이 있기도 하고, 탄자니아와 케냐, 우간다 등 동아프리카 3개국의 경제공동체 인 동아프리카공동체(EAC) 본부가 있기도 하다.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 입구의 길거리 팻말에는 아루샤를 "아프리카의 제네바"라며 "탄자니아와 세계를 연결하는 도시"라고 선전하고 있었다. 국제노동기구와 세계보건기구, 국제적십자사, 국제통신연합 등 국제기구가 많은 스위스의 제네바처럼 아루샤도 국제회의장과 국제기구가 많다는 홍보이다.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를 들어가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출입구에서 신분증 검사를 하는데, 여권을 맡기고 방문증을 받으면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건물 안의 사진 촬영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건물 안 1층의 게시판에는 재판부 이름과 법정 호수, 재판 날짜 등이 공고되어 있었다. 2 재판부의 판사 이름에는 "S K. PARK"이라는 박씨 성을 가진 한국인 판사도 보였다. 나는 우리나라 판사가 진행하는 재판을 보고 싶었으나 마침 이날은 재판이 없었다.

▲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의 안쪽 건물입구
ⓒ 김성호

재판장이 직접 증인을 신문하다

게시판을 보니 2호 법정에서만 재판을 진행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갔으나 아직 재판이 열리지 않았다. 10분 뒤 열린다고 해서 사진기를 맡기고 재판정의 방청석으로 미리 들어갔다. 영어와 프랑스어를 동시통역하는 라디오와 이어폰 중 골라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영어통역기를 선택했다.

앞쪽에는 유리로 가린 재판정이 있었고, 통로를 사이에 두고 뒤쪽에 역시 유리로 가린 방청석이 따로 설치되어 있었다. 재판정은 일반 재판정과 같았는데, 가운데 높은 곳에 판사석이 있었고 정면을 바라보고 오른쪽에는 검찰관이, 왼쪽에는 피고의 변호인단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중앙에 피고인과 증인석이 있었다. 판사석 앞쪽으로는 법원직원들이 앉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오후 4시 30분 정각 재판 시작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자 직원들이 모두 일어섰고, 잠시 후 재판관 3명이 검은 법복을 입고 들어섰다. 재판관 3명이 모두 흑인이었다. 재판장은 안경을 낀 50대 중반의 남자이고, 좌우 배석판사는 모두 여자인데 한 명은 50대 후반의 안경을 낀 여성이었고, 다른 사람은 40대 중반의 여성이었다.

검찰관은 백인 남성이었고, 변호인단에는 프랑스 변호사와 흑인 변호사들이 같이 있었다. 재판관은 검은 가운에 빨간 머플러와 중앙에 흰 머플러를 입었고, 검찰과 변호인단, 그리고 직원들은 모두 검은 가운에 흰 머플러를 입고 있었다.

재판관이 앉자 바로 재판이 시작되었다. 증인신문 차례였다. 증인석에는 50대 중반의 흑인이 서 있었다. 증인은 르완다 병원의 원무행정 책임자인 것 같았다. 검찰은 당시 병원에 실려 왔던 희생자들의 치료과정과 진료 기록의 최종 서명자에 대해 추궁하고 있었다.

50대 중반의 증인은 피고인이 아닌데도 매우 긴장한 듯 더듬거리고, 정확히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표정도 내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변호인의 경우는 프랑스 여자 변호사가 증인에게 짧게 묻고는 주로 듣고 있었다.

증인이 병원의 진료기록을 누가 작성했고, 최종적으로 서명했느냐에 대해 뚜렷한 답변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답답한 듯 재판장이 직접 증인을 대상으로 신문을 하기 시작했다.

"누가 진료 기록을 만드느냐?"
"진료를 맡은 의사가 하게 되어 있다."
"그럼 병원의 진단 기록을 발급할 때는 누가 최종 서명을 하느냐?"
"병원의 최종 책임자가 한다."

이날 재판은 영어와 프랑스어, 키니아르완다어 등 3개 국어로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검찰관이나 재판관, 증인이 각자 자국어로 말을 하면 3개 국어로 동시통역이 되고 있었다. 검찰관 뒤쪽에 프랑스어와 영어, 키니아르완다어를 통역하는 통역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날 재판에서는 검찰관은 영어로 질문하고, 증인은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변호인단도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재판장도 영어를 사용했는데, 재판관 모두가 귀에 통역기를 끼고 있었다.

증인도 통역기를 끼고 있었는데, 검찰의 영어 신문을 동시통역사가 프랑스어로 통역해주면 증인이 프랑스어로 답하고 다시 통역사가 영어로 통역하면 검찰이 다시 신문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여러 차례의 통역을 거치다보니 재판진행은 매우 더디었다.

재판관석 뒤에는 국제사법기구의 상징인 정의의 저울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재판과정은 건물 1층의 텔레비전을 통해서도 공개되고 있었다.

▲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에서 나오는 보도자료
ⓒ 김성호

대량학살 혐의로 법정에 선 가톨릭 신부

1시간 가량 재판과정을 구경하다 재판정을 나와 1층으로 내려왔다. 1층의 게시판 옆에 기자들과 방문객들을 위한 보도자료(Press Release)가 놓여 있었다. 맨 위에 있는 2006년 6월 28일자 보도자료를 보니 내가 방문하기 바로 앞선 주인 6월 27일과 28일 재판기록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었다. 아타나세 세롬바(Athanase Seromba)라는 이름의 가톨릭 신부에 대한 재판이었다.

자료에는 "가톨릭 신부인 세롬바는 후투족의 투치족에 대한 대량 학살을 방조했을 뿐 아니라 성당을 불도저로 밀어붙이도록 해 2천명 이상의 투치족 피난민을 죽음으로 몰아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검찰은 세롬바에게 종신형을 구형했다고 되어 있었다.

나는 아프리카 여행을 마친 뒤인 2006년 12월 국제뉴스를 통해 세롬바 신부에게 징역 15년 형이 선고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가 가톨릭 신부에게 유죄를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또 다른 가톨릭 사제 2명에 대한 공판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보도자료에는 세롬바 뿐 아니라 현재 기소된 26명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또한 그동안 28명에 대해 판결을 내렸는데, 25명이 유죄를 받았고, 3명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르완다 인종학살 주범에 대해서는 최고 500만달러(50억원)의 보상금이 제보자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권력을 잃은 범죄자들이 숨을 곳은 거의 없다.

나는 건물을 나와서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 로고가 있는 건물 외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직원에게 허락을 받은 뒤에나 가능했다. 팻말에는 사전허락 없이 외부 건물도 일체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반인도적 범죄를 다루는 국제사법기구의 재판을 처음으로 지켜보았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었다. 누구나 여권만 가지고 있으면 방청이 가능하기 때문에 우루샤에 가면 사파리 뿐 아니라 르완다전쟁범죄 재판과정을 방청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 아루샤의 우후루 기념탑
ⓒ 김성호

아프리카 사회주의를 선언했던 아루샤 기념탑

숙소로 돌아오는데, 작은 냇물 같은 강이 우루샤를 동서로 가르고 있었다. 강의 이름은 나우라 강이다. 나우라 강에서 작은 나무 사이로 흰 구름이 산허리를 휘감고 있는 아름다운 산도 보였다. 킬리만자로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산인 4566m 높이의 메루 산이다. 메루 산은 아루샤 국립공원 안에 있는데, 산 정상이 뾰족해 매우 험난해 보였다.

나우라 강을 건너자마자 사거리에 높은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우후루(Uhuru) 기념탑이다. 우후루는 스와힐리어로 '자유 또는 독립'이라는 뜻이다. 탄자니아의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통령인 줄리우스 니에레레 대통령이 지난 1967년 '아루샤 선언'을 기념해 만들 탑이다. 아루샤 선언은 탄자니아 역사에서 중요한 정치적 분수령이 되는 일종의 정치강령이다.

니에레레 당시 대통령은 이곳 아루샤에서 발표한 선언을 통해 탄자니아의 나아갈 방향으로 '아프리카식 사회주의' 노선을 천명했다. 아프리카 전통의 우자마(Ujamaa; 가족애) 정신에 입각해 자급자족의 공동체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마을농장을 집단화하는 등 협동농업에 기초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통해 '가족 같은 사회'를 만들자는 이상을 표방했다. 은행과 금융기관들도 국유화했다. 우후루 기념탑 옆에는 아루샤 선언 박물관이 있다.

아루샤는 세계적 관광지답게 호텔과 게스트하우스가 즐비하고, 특히 사흘 동안 전혀 만나지 못했던 외국 여행객들이 어디서 모였는지 아루샤에 집결해 있었다. 내가 묵은 플라밍고 호텔은 3층짜리 숙소인데, 버스터미널과 축구경기장에 가까이에 있다. 아루샤도 전기가 모자라 낮에는 들어오지 않다가 저녁 7시부터 전기가 공급되었다.

▲ 흰 구름이 산허리를 휘감고 있는 메루 산
ⓒ 김성호

아프리카에서 만난 우리 해외봉사단원

숙소 근처에 칸 바비큐(Khan's Barbecue)라는 음식점이 있어 나는 자주 이용했다. 닭고기와 쇠고기, 감자구운 칩과 각종 야채 등이 있는 이곳에는 육식주의자 뿐 아니라 채식주의자들도 많이 찾았다. 낮에는 자동차 수리점을 하고 저녁 시간대만 야외 바비큐 음식을 파는 이곳은 인도계 남자가 운영하고 있었다. 매콤하면서 야채가 많아서 좋았다.

칸 바비큐에서 예상치 않은 우리나라 젊은이를 만나기도 했다. 음식을 고르고 있는데, 20대 중반의 젊은이가 다가와 "한국에서 오셨습니까"하고 인사를 한다. 나는 처음에 중국계로 생각했는데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서 파견한 해외봉사단원이었다. 한국국제협력단은 미국 정부가 1960년대부터 전 세계 개발도상국 중심으로 젊은이들을 해외봉사자로 파견했던 평화봉사단(Peace Corps)과 같은 단체이다.

이 젊은이는 해외봉사단원 중에서도 국제협력봉사요원으로 일정기간 해외에서 봉사를 하면 병역근무가 면제되는 해외 공익근무요원이었다. 지난 2004년 파견되어 그동안 다르에스살람에서 근무하다 몇 개월 전에 아루샤로 옮겼다고 했다.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치고 있었다.

아프리카 젊은이들의 컴퓨터에 대한 열의는 대단하다고 이 젊은이는 전했다. 내가 묵던 숙소의 젊은 여직원도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컴퓨터를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삼성과 엘지가 컴퓨터와 전자분야에서 세계적 기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아프리카 오지에까지 우리의 젊은이들이 진출해 있는 것을 보고 뿌듯했다. 젊었을 때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이다. 굳이 23살의 나이에 남미를 여행하고 혁명가의 길로 나선 체 게바라의 '세상을 바꾼 여행'을 거론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늦게까지 한국 젊은이들의 세계진출과 특히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젊은이에 대한 국가차원의 해외진출 지원, 국제협력봉사단의 역할, 우리나라와 아프리카의 연대방안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젊은이에게 말했다. "반드시 2년여 동안의 아프리카 봉사활동에 대해 기록을 남겨라"고. 책이든 보고서든 어떤 형태든 기록을 남겨야 다음에 오는 사람이 그 기록 위에 또 다시 기록을 남길 수 있다. 역사의 진보는 지식의 축적의 결과이고, 지식의 축적은 기록의 축적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 아루샤를 동서로 가르는 나우라 강
ⓒ 김성호

태그:#아프리카, #탄자니아, #싱기다, #아루샤,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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