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삼성 관련기사 삭제' 이후 편집권 독립을 위해 싸워왔던 <시사저널> 기자들이 27일 <오마이뉴스>가 마련한 방담에 초대돼 지난 1년여 간의 힘겨웠던 투쟁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사진은 주진우 기자.
ⓒ 오마이뉴스 남소연
실컷 취재해 놓은 기사가 안나왔을 기자들이 출입처에 내미는 단골 레퍼토리가 있다.

"밀렸다."

기자 자신이 작성해서 올린 기사는 원래 그렇지 않은데, 편집(데스킹) 과정에서 축소, 삭제, 혹은 관점이 달라졌다고 그렇게 볼멘소리를 낸다. 취재원은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아준다. 그래, 일개 기자가 뭔 힘이 있냐. 그럴 때 편집권은 일종의 '면책 알리바이'가 되는 것이다.

'진품' 시사저널의 주진우 기자는 그와 반대다.

"내가 시사저널에 와서 선배들에게 배운 것은 '너의 기사를 실현하라'는 것이었다. 기사의 요건을 따져 일단 편집장이 '오케이'를 하면 그 뒤 아무도 기자를 말릴 수 없다."

심지어 '선배들에게도 대들라'고 선배들이 가르쳤다고 한다. 주 기자는 시사저널에서 삼성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기사를 쓰는 기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경영진의 회유도 많았고 삼성의 놀라운 관리를 받기도 했다.

"내 옆자리에 앉은 기자도 모르는 내 사생활을 다 꿰고 있더라. 아내와의 관계가 어떤지, 아이가 초등학교 몇학년이 되는지까지. '가정이 중요하지 일이 중요하냐' '초등학교 4학년이면 외국으로 학교를 보내는게 좋은데' 뭐 그런 식의 조언까지 들었다. 무서운 정보력이다."

그런 이중삼중의 방어를 뚫고 어떻게 삼성 비판 기사를 작성했을까? "잘 못했다. 그런데 다른 데선 너무 안쓰니까." 그에게 돌아온 답이다. 기자가 데스크의 핑계를 댄다면, 사시를 거역할 수 없음을 한탄만 하고 있다면 그건 기자가 아니다. 월급쟁이와 뭐가 다른가. 기자 자신이 독립기관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말이다. '편집권 독립'은 기자를 기자이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인 셈이다.

시사저널 사태의 핵심은 바로 그것이었다. 작년 6월 이학수 삼성그룹 부회장의 인사정책을 비판하는 기사가 인쇄과정에서 무단 삭제되었다. '삼성 출신' 금창태 시사저널 사장의 독단이었다. 기자들은 그 뒤 반년은 일하면서 싸우고, 반년은 거리에서 편집권 독립을 외쳤지만 사측은 요지부동. 결국 지난 26일 결별 기자회견이 있었다. 굿바이 시사저널! 인생에는 물러설 때와 맞설 때가 있다고 한다. 이들은 '위대한 포기' '생산적인 싸움'쪽을 선택했다.

▲ '삼성 관련기사 삭제' 이후 편집권 독립을 위해 싸워왔던 <시사저널> 기자들이 27일 <오마이뉴스>가 마련한 방담에 초대돼 지난 1년여 간의 힘겨웠던 투쟁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사진 오른쪽부터 문정우 전 편집장, 사회자 최광기씨, 주진우 윤무영 기자.
ⓒ 오마이뉴스 남소연

"나라 운명 좌우할 대기업 감시할 수 있도록"

그런데 세상은 너무 조용하다. 이튿날 조중동엔 기사 한줄 나지 않았다. MBC SBS 역시 다루지 않았다. 대신 지면마다 청와대의 기자실 통폐합 문제에 대해선 목소리가 높다. 중앙일보는 '기자를 모두 없애라?'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기자실은 정부 감시 위해 국민들이 만들어준 공간"이라며 "대못질" 말라 한다. 그럼 자본권력에 대한 감시는? 그 때문에 기자 전원이 사표를 낸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는데도 사실보도조차 외면하는 자신들에 대해선 뭐라 합리화할까.

암튼, 이 점잖은 세태에 소동이 필요했다. <오마이뉴스>가 급한대로 '생중계 방담'이라도 꾸려보자고 지난밤 '자정 결의'한 것은 그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독자들의 댓글이 시끄러웠다. 18년 독립언론 시사저널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장례식을 이렇게 조용히 치를 수는 없지 않은가.

눈물이 쏟아져 기자회견장에는 가지도 못했다는 최광기씨가 초치기 섭외에도 응해주었고, 시사저널 파업이 낳은 퀴즈영웅 고재열 기자가 캐스팅 담당이 되어 새매체 창간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문정우 전 편집장과 단식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은 김은남 기자, 안은주, 주진우, 윤무영 기자를 불러냈다.

웃다 울다, 웃음과 눈물이 범벅된 방담이었다. 결별기자회견장에선 여기자들이 눈물바람을 했는데 이날은 남기자들의 누선이 터졌다.

윤무영 기자는 IMF 때 사주는 해외로 도망하고 1년 8개월 동안 월급도 받지 못하고 시사저널을 지키고 있을 때 선배들의 도움으로 동티모르 해외 출장을 갔던 일을 회상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늘상 '웃자주의'를 표방한 고재열 기자는 회사가 동원한 용역 깡패와 몸싸움 끝에 와이셔츠마다 단추가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며 어제 회견장에 나올 때 입은 와이셔츠도 단추가 떨어져 나간 것이었다고 말하는 순간,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이제는 새매체를 만들면 단추 떨어질 일 없겠다"며 다시 웃어보였다.

이날 시사저널 기자들이 내린 결론은 "독자가 힘"이다! 심상기 시사저널 회장 집 앞에서 단식 농성을 벌이는 동안 심 회장은 "피신을 간 건지 피서를 간 건지" 얼굴 한번 볼 수 없었지만 지방에서 한 독자는 단식자들에게 시원한 물을 먹이기 위해 약수를 얼려왔고 24시간 농성장을 함께 지켜주었다고 한다. 초보 노조라 구호도 못만들고 쟁의기금도 없이 시작한 싸움이었지만 투쟁 노하우를 독자들에게 배웠다.

오마이뉴스 게시판에는 "시사저널 기자들을 현장으로 보내자"며 갖가지 제안이 쏟아지고 있다. 시사저널 22명의 기자가 창간할 새매체 정기구독자를 자청하는 이들, 오마이뉴스 원고료를 후원통장으로 이체해 달라는 요청, 새 매체 창간 후원금 계좌(국민은행 832102-04-095740, 예금주 유옥경)를 퍼나르며 1만원씩 송금하자는 시민기자들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 '삼성 관련기사 삭제' 이후 편집권 독립을 위해 싸워왔던 <시사저널> 기자들이 27일 <오마이뉴스>가 마련한 방담에 초대돼 지난 1년여 간의 힘겨웠던 투쟁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윤무영 기자는 함께 싸웠던 동료 기자들을 떠올리며 끝내 눈물을 보였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사회자 최광기씨의 독자들을 향해 후원 광고를 해보라는 주문에 문정우 전 편집장은 이렇게 말했다.

"고통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기자들이 강해지고 성숙해졌다. 취재현장으로 돌아가면 좋은 보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30, 40억원 정도 들여서 우리나라 운명을 좌우할 대기업 집단을 견제할 수 있다면 적은 댓가로 큰일을 하는 것 아닌가. 도와달라."

오마이뉴스는 몇번 이와 같은 일로 '사고'를 친 적이 있다. 대표적인 게 지난 2004년 국회가 외면한 친일인명사전편찬에 분노가 촉발돼 모금운동이 일어났고, 11일만에 5억원을 넘는 기염을 토했었다. '친일청산, 니들이 안하면 우리가 한다'며 네티즌이 보여준 자발적 운동이었다. 대부분이 1인 1만원 소액 참여였다. 그러기에 더 값졌다.

27일 현재, 시사모(시사저널을사랑하는사람들의 모임) 회원은 2197명. 결별기자회견이 있은 후 하룻새 후원금은 263만원이 모였다. 노조측에선 1만원 이상 소액후원은 '정기구독 예약금'(1년 15만원, 시사저널 정기구독료와 같다) 형태로 받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시사저널의 이문재 기자는 후배들에게 "기자에겐 어떤 특혜도 없다, 질문할 자유만 있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22명의 전사들이 앞으로 세상에 던질 질문이 궁금하다.

▲ '삼성 관련기사 삭제' 이후 편집권 독립을 위해 싸워왔던 시사저널 기자들이 26일 전원 사표를 제출하며 사측과 결별을 선언했다. 1년여동안 끌어왔던 사측과의 줄다리기를 끝내며 편집국 현판 앞에 모인 기자들은 "굿바이~ 시사저널!" 을 외치며 애써 웃음을 지어보였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덧붙이는 글 | 새 매체 창간 후원금 계좌 : 국민은행 832102-04-095740 (예금주 유옥경)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