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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월 10일 헌재의 공개변론에 앞서 헌재 정문 옆에서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는 이건우씨.
ⓒ 백병규
"오늘 헌재 판결은 재일동포들에겐 진정한 광복이 될 것입니다…."

그의 말은 순간 떨렸다. 복받쳐 오르는 그 '무엇' 때문에 그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지난 12년 동안 쌓이고 쌓였던 원망(願望) 때문이었을까. 그 과정에서 겪었던 온갖 우여곡절이 한순간에 떠올랐던 걸까.

한 사람이 있었다. 재일동포 이건우(55)씨.

지난 6월 28일 헌법재판소가 재일동포를 비롯해 재외국민 14명(재일동포 10명, 재미동포 4명)이 낸 헌법소원에서 재외국민에게 선거권을 주고 있지 않은 공직선거법 관련 조항들은 '위헌'이라고 결정한 직후 헌재 대법정 앞에서 그는 '헌재 판결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읽었다.

그에게 이 날은 잊을 수 없는 날이 될 것이다. 지난 1995년 10월, 홀로 시작하다시피 했던 재외국민 선거권회복 운동이 마침내 결실을 본 날이기 때문이다.

재외국민 부재의 땅이었던 대한민국

12년 전, 그가 처음 재외국민의 선거권을 주장했을 때 대한민국은 재외국민 부재의 땅이었다. 재외국민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 대신 재일동포, 재미동포라는 말만 있었다. 중국 동포나 사할린 동포와의 구별도 없었다. 대한민국의 '국민' 개념은 대한민국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그런 것이었다.

그가 재외국민의 선거권을 이야기하면 "재일동포가 우리나라 국민이냐"고 되묻는 사람이 많았다. "중국동포, 사할린동포에게도 다 선거권을 주자는 말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자기 잘 살자고 외국에 나간 사람들에게, 미국 시민권 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왜 선거권을 줘야 하느냐"는 힐책도 적지 않게 들어야 했다.

내로라하는 당시의 시민운동가들, 인권단체들도 그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해외에 있는 국민들에게 선거권을 준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 주장'으로 치부됐다. 병역의무나 납세의무를 지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선거권을 주느냐는 반문은 꼭 따라다니는 필수 답변사항이었다.

몇몇 국내 지인들을 중심으로 작은 토론회도 갖고, 96년 4월 '조국참정권시민연대'라는 모임도 만들었다(이듬해인 97년 '재일국민조국참정권시민연대'로 정식 발족). 일본에서는 그가 거주하고 있는 오사카 지역을 중심으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공부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다른 재일동포 8명과 함께 헌법소원을 냈다. 대선 후보들에게는 재외국민의 선거권 보장 여부에 대한 '공개질의서'를 보내 김대중·김종필·이회창 후보로부터 "당선되면 임기 중에 재외국민의 선거권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외로운 작업이었지만, 그래도 뜻있는 사람들의 '응원'이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특히 <한겨레>의 도움이 컸다.

"퀴즈 문제를 하나 내보자.
첫 번째 문제: 재일동포의 국적은 한국인가, 일본인가?
두 번째 문제: 재일동포는 한국 여권을 가지고 다니는가, 일본 여권을 가지고 다니는가?"


이렇게 시작하는 96년 2월 15일자 <한겨레21> 기획특집 '재일동포에게 조국참정권을'은 재외국민의 선거권 문제를 제기한 최초의 언론 보도였다. 당시 <한겨레21> 오귀환 편집장은 이씨에게서 기획특집 기사의 첫머리 글과 똑같은 질문을 받고 말문을 잇지 못하다가 이씨가 보여준 '대한민국 여권'과 '재외국민등록증'을 보고, 재일동포들이 겪고 있는 정체성의 혼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씨는 "그런 오귀환씨를 평생 잊지 못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 때 특별취재팀 일원이었던 오태규(현 <한겨레> 수석부국장) 기자와의 인연도 그렇게 시작됐다. <한겨레21> 특집기획에서 재외국민 선거권이 지구촌의 일반적 추세라는 사실을 환기시켜 준 것("지구 어디서라도 투표하라")은 당시 프리랜서 기자였던 안해룡씨였다. '아시아프레스 인터내셔널'이란 아시아 프리랜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던 그였기에 가능했던 '시야'였을지 모른다.

그 후로도 그는 고비마다 뜻있는 기자들의 관심으로 그의 뜻을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가 기자를 찾았지만, 어찌 알고 그에게 접촉해오는 기자들이 조금씩 늘었다. 주로 '젊은 기자'들이었다. 재외국민에 대한 새로운 시야가 열리고 있었다. 그들 또한 처음에는 다들 그가 수없이 되풀이해 답변했던 많은 의문들을 제기했지만, 이해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졌다.

점차 정치권에서도 호응이 있었다. 이부영, 정범구 의원 등이 법안 마련에 나섰다.

그의 운동은 대중적이지는 못했다. 국내 호응도가 낮아서였기도 했지만, 재일동포들의 여건과 문화의 탓이 컸다. 재일동포들의 입장과 이해를 대변할 민단(재일거류민단)은 '조국 참정권'에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일본에서의 '지방참정권'에 목을 매고 있었다. 그가 재일국민의 선거권 운동에 나선 주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단기 해외체류자만 투표권 부여하자" 주장 '절망'

▲ 헌법재판소는 지난 28일 재외동포의 참정권 제한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8년만에 판결을 뒤집은 셈이다.
ⓒ 백병규
일본에서의 지방 참정권은 당연히 일본 현지에 거주하는 주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주민권일 수는 있다. 하지만 동포 사회의 정치적 관심을 그 쪽으로 몰아가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일본 사회로의 '동화'를 의미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2세, 3세로 갈수록 민족의식이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은 자꾸 옅어져 가는 추세 아닌가. 그렇게 된다면 결국 3세, 4세로 갈수록 민족의 정체성 역시 더욱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는 절박성이 그를 어려운 길로 나서게 했다.

하지만 동포사회의 적극적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는 어려움이 컸다. 재일동포들은 단 한번도 조국에 대해, 또 일본에 대해 자기주장을 펴 본 경험이 없다. 일제 식민지시대에는 물론 해방 이후에도 일본사회에서 재일동포들은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었다. 권리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해방된 조국도 멀기는 마찬가지였다. 동포들과는 유리된 민단간부들만이 조국과 '정치적 거래'로 자신들의 영향력과 이권을 유지했을 뿐이다. 조국에 대해서 국민의 권리로서 무엇을 요구한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일본은 일본인들도 살기가 각박한 사회다. 차별 속에서 어렵사리 삶의 터전을 마련한 동포들 삶은 더욱 여유가 없기 마련이다. 여유롭게 동포 사회를 대신해 '전업'으로 뛰어줄 사람은 거의 없다. 조국에서 대학을 다녔거나 조국에 대한 애착이 강한 주변 동포들과 함께 먼저 '공부'부터 시작했다. 그런 모임을 통해 '조국참정권회복을 위한시민연대' 회원들을 하나 둘 모아갔고, 거기에서 1, 2차 헌법소원단을 꾸릴 수 있었다

이씨 등 재일동포 9명은 97년 헌법소원을 냈으나 헌재는 99년 2월 이를 기각했다. 재외국민 투표를 인정할 경우 헌법상 대한민국의 영토로 돼 있는 북한 주민들까지 선거권을 요구할 수 있으며, 선거의 공정성 시비, 과다한 경비 부담 등이 예상되는 만큼 선거권이 기본권이지만 이를 제약할 수 있다고 보았다.

더 이상 희망이 없나 싶을 정도로 어려운 때였다. 재외국민의 선거권 문제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면서 정치권에서도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재일동포와 같은 영주권자를 제외하고 유학생이나 상사 주재원 같은 단기 체류자들에게만 부재자투표를 허용하자"는 '단계론'이 득세했다. 정치권의 흐름도 그런 방향을 타기 시작했다. 일부 해외영주권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부정적 인식 탓이 컸지만 이 같은 흐름에는 정치권의 복잡한 '표계산'도 한 몫 했다.

그것은 가고 싶어 간 것도 아니고, 꼭 있고 싶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곳이 생활의 터전이어서 차별과 일본의 귀화정책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살아 온 재일동포들에게는 더 견디기 힘든 조국으로부터의 차별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씨처럼 조국과의 소통과 연대를 절실히 소망하며 이 운동에 나섰던 재일동포들로서는 또 다른 박탈감을 느껴야 했다.

이겼지만 아쉬운 헌재 판결

정치권의 움직임만을 바라 볼 수 없다고 판단한 이씨는 2004년 재일동포 10명으로 제2차 헌법소원단을 꾸렸다. 여기에는 병역을 필한 재일동포 이수남씨도 있었다. 법무법인 남강의 정지석 변호사가 새롭게 대리인을 맡았다. 정지석 변호사와는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송으로 한 번 호흡을 맞춘 사이였다.

정치권의 지지부진한 논의를 본 두 사람은 다시 의기투합했다. 같은 사안이라도 청구인을 달리할 경우 헌법소원을 다시 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했던 것. 이 때문에 정지석 변호사는 그를 두고 '기각 청구인'이라고 농을 걸곤 한다.

헌재는 28일 그들의 소망에 답했다. 지난 5월 헌재가 이례적으로 이 사건에 대한 '공개변론'을 열 때 승소를 직감했다. 헌재가 한번 기각판결을 내렸던 사안을 두고 공개변론을 하기로 한 것은 그것을 변경할 의사가 있지 않고서는 예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문제는 조건이 붙지 않은 단순 '위헌'이냐, 아니면 입법부에 위헌 법률 조항들의 정비에 다소 시간적 여유를 주는 '헌법불합치' 결정이냐가 문제였다. 헌재는 결국 '헌법불합치'를 선택했다. '옥의 티' 같은 아쉬움이 남는 결정이었다. 12월 대선이나 4월 총선의 참여 여부가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헌재 결정 직후 "정치권이 이제는 정말 표계산 같은 짧은 소견으로 정치적 이해를 저울질 할 것이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 인권 차원에서 이 문제를 빨리 매듭지어 줄 것"을 호소했다. 이제 "한국의 정치인들도 비로소 글로벌한 시각으로 정치를 하게 되지 않겠느냐"고 기대했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 얽매이는 정치세력은 미래의 희망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번 사건의 변론을 주도한 정지석 변호사는 "이제야 말로 대한민국이 보통선거권을 실현한 나라가 됐다"고 말했다. 200여만 명에 이르는 재외국민의 선거권을 박탈한 선거를 두고 보통선거를 실시하는 나라라고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헌재의 이번 결정이야말로 국민의 기본권을 재확인하고 다수자의 횡포로부터 소수자의 권익을 보호했다는 점에서 헌재 사상 가장 의미 있는 결정"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씨는 재일동포 2세다. 청소년기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방황하던 그는 그 해답을 찾아 조국을 찾았다. 71년도에 고려대학에 입학한 그는 유신치하라는 엄혹한 정치 상황 속에 놓인 조국의 치열한 현실과 만난다. 학생운동에 참여해 모진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암울한 시절이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저항에 나선 선후배, 동료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는 비로소 '보통 한국인'으로 거듭난다. 그는 두 딸 역시 그의 모교에 보냈다.

90년대 초반 한·중·일 3국 동시 현지어 발행 '아시아넷'의 창간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지금은 일본에서 식품중개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일본 귀화? 동화? 민족이 소멸된다면 조국이 부끄러울 것"

지난 2002년 2월 7일 정범구 의원이 주최한 재외국민 선거권 국회 공청회에서 그는 이렇게 호소했었다.

"일본 국민이나 국회의원 중에는 재일한국·조선인은 멀지 않아 완전히 동화 소멸된다며 민족말살을 지금도 믿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역사란 덮어씌우는 것 외에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만일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대로 민족이 소멸한다면 그 부끄러움은 우리(재일동포)의 부끄러움이 아니라, 결국 조국의 부끄러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한국인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권리를 주십시오. 1세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 손을 잡고 난생 처음으로 투표하는 장면을 상상해 주세요. 이것이 세대를 연결해가는 일입니다. 이제 1세들은 거의 없어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헌재는 국회에 관련법을 내년 12월까지 손 보라고 결정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 때까지 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덧붙였다.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국민의 기본권 침해 상태를 끝내라는 점잖은 주문인 셈이다.

국회와 정부가 관련 법 정비를 내년 연말까지 미룰 경우 재외국민들은 결국 빨라야 4, 5년 뒤에나 국회의원 선거, 대통령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때면 지금 생존해있는 재일동포 1세대들에게는 너무 늦어버릴지 모른다.

이들 재일동포 1세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우선해 회복된 기본권 행사의 기쁨을 누려야 할 분들이 아닐까. 그런 분들에게 그 기회를 줄 것인지 여부는 전적으로 지금 국회의원들에게 달려 있다.

#재외국민#선거권#재일동포#이건우#정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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