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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이 싹 틀 때 날짐승들은 콩밭을 망가뜨린다. 콩밭을 지키고 계시는 할머니. 진한 삶의 현장이다.
콩이 싹 틀 때 날짐승들은 콩밭을 망가뜨린다. 콩밭을 지키고 계시는 할머니. 진한 삶의 현장이다. ⓒ 전갑남
물이 가득 찬 논에 벼가 몰라보게 자랐다. 모를 낸 지 근 한 달 보름이 되었다. 흥겹게 춤이라도 추고 있는 듯 바람결에 넘실대고 있다. 들판에서 펼쳐지는 초록의 아름다움만 보아도 마음이 넉넉해진다.

장마가 오락가락한다. 비가 그치자 동네 사람들이 밭에 죄다 나왔다. 옆집 아저씨는 농약통을 짊어졌다. 참외 순을 질러주는 나를 보고 묻는다.

"고추소독은 안 해?"
"물기가 말라야지요. 그러고 약친 지 열흘밖에 안 된 걸요."
"비 그치면 무조건 치는 거야!"
"내일은 날이 갠다니까 그때나…."


아저씨는 우물쭈물하다가는 병에 녹아나는 수가 있으니 때맞춰 소독을 하란다. 나도 고추밭이 뽀송뽀송해지면 열일 제쳐놓고 소독부터 해야겠다. 일 바쁜 농촌, 장마철이라고 한숨 돌릴 새가 없다.

요즘은 질커덕거리는 밭에 콩을 심느라 야단들이다. 감자, 강낭콩을 수확한 자리나 논둑, 제방에도 서리태를 심는다. 씨를 직접 넣기도 하지만 모를 내어 옮기기도 한다.

날짐승이 허수아비를 무서워할까?

서리태 씨를 넣은 콩밭이다. 요즘 한창 콩을 심을 때이다.
서리태 씨를 넣은 콩밭이다. 요즘 한창 콩을 심을 때이다. ⓒ 전갑남
서리태는 지금 심어야 적기이다. 아내는 서리태를 무척 좋아한다. 검은콩에 대한 효과를 어디서 들었는지 올해는 좀 넉넉히 심자고 한다.

서리태는 생육기간이 길다. 10월경, 서리를 맞은 뒤에 수확한다 하여 불린 이름이다. 영양덩어리인 서리태는 단백질과 식물성 지방질을 많이 함유하고, 신진대사에 필요한 비타민 B군과 나이아신 성분이 풍부하다. 또 안토시아닌 색소가 많아서 장기복용하면 노화방지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다.

아내는 서리태를 불려서 냉동실에 보관하여 먹는다. 주로 밥에 넣어 먹는데, 여름철에 콩국을 내려 국수를 해먹으면 맛이 달콤하다. 올해는 발효시켜 청국장을 띄워 먹고 싶다고 한다.

콩 심은 데 찾아와 일을 벌이고 있는 까치. 싹 튼 콩을 파먹는다.
콩 심은 데 찾아와 일을 벌이고 있는 까치. 싹 튼 콩을 파먹는다. ⓒ 전갑남
그런데 콩을 심어 싹이 틀 때, 날짐승들이 장난을 쳐서 애를 먹인다. 떡잎이 땅 위로 올라오면 영악스럽게 파먹기 때문이다. 비둘기, 까지가 범인들이다.

엊그제 일이다. 퇴근하고 집에 오는데, 고샅 들머리 콩밭에서 할머니가 주저앉아 계셨다.

"할머니 쉬고 계세요?"
"쉬기는! 날짐승 떼 망보고 있는 중이야."
"녀석들이 콩 씨를 파먹죠?"
"파먹는 게 아냐! 죄다 망쳐놓아 살 수가 있어야지!"
"허수아비라도 해놓지 그러세요?"
"고놈들, 허수아비인지 사람인지 구분 못할까 싶어?"


날짐승이 지나간 자리. 애써 심은 것을 헤쳐놓으면 속이 상한다.
날짐승이 지나간 자리. 애써 심은 것을 헤쳐놓으면 속이 상한다. ⓒ 전갑남
할머니는 날짐승들이 영악스럽기가 사람 못지않다는 것이다. 싹 트는 것을 어찌 알고 파먹는지 미워죽을 지경이란다. 허수아비라도 세워서 달려들지 못하도록 하고 싶지만, 지키고 있는 것만 하겠느냐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할머니는 200여 평 넓은 밭에 놉까지 얻어 서리태를 많이 심었다. 그런데 날짐승들이 이 난리를 피우고 있으니 망이라도 봐야 마음이 놓이시는 모양이었다. 할머니 마음고생이 느껴졌다.

밭에 세워둔 허수아비에서 농부의 마음을 읽다

요즘 이곳저곳에 허수아비가 심심찮게 등장했다. 콩을 심고 몰려드는 날짐승을 쫓아보려는 마음에서 세운 것들이다.

어떤 것은 허수아비 같지도 않았다. 비닐부대를 거꾸로 뒤집어놓기도 하고, 깃발을 꽂아놓았다. 또, 출렁이는 줄을 늘여놓기도 했다.

그래도 어떤 것은 제법 멋진 허수아비가 눈에 띈다. 며칠 전 일이다. 읍내에 다녀오는데 운전을 하는 아내가 꼬박꼬박 조는 나를 깨웠다.

모처럼 본 허수아비. 정겨운 농촌의 풍경이다.
모처럼 본 허수아비. 정겨운 농촌의 풍경이다. ⓒ 전갑남
"여보, 저기 허수아비 좀 봐! 누가 이렇게 멋지게 치장을 했지?"

이곳에도 콩을 심어놓았다. 이리저리 출렁이는 줄을 늘이고, 그럴듯하게 허수아비를 만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허수아비였다. 가식이 없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십자로 대를 엮어 옷을 입히고, 모자도 씌웠다. 형형색색으로 한껏 멋을 부렸다. 일 바쁜 농부가 어떻게 짬을 내어 허수아비를 만들었을까? 농부의 마음과 함께 예술작품이라도 보는 듯싶었다.

이곳저곳 허수아비를 찾아 사진을 찍는 나를 보고 아내가 물었다.

우리가 사는 동네 이곳저곳에서 본 허수아비들.
우리가 사는 동네 이곳저곳에서 본 허수아비들. ⓒ 전갑남
"여보, 허수아비를 세워두면 효과가 있을까?"
"글쎄, 원래 날짐승을 새대가리라고 하잖아! 사람으로 착각하지 않을까!"


정말 날짐승이 허수아비를 보고 무서워할까 싶다. 허수아비를 세워두는 것은 정성들여 가꾼 작물을 지키려는 농부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정겨운 농촌 풍경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흐뭇하다. 날짐승들이 농부의 마음을 알고 제발 콩밭에서 말썽을 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씨를 직접 넣어? 모를 부어 내야 하나?

오늘(2일)은 우리도 감자 캔 자리에 서리태를 넣을 참이다. 미리 두 판자를 골라놓았다.

"콩 모를 내서 심으면 날짐승 피해를 줄인다는데!"
"그걸 누가 모르나, 힘들어서 그렇지!"


씨를 직접 심어야 하나, 모를 부어 옮겨 심어야 하나? 판자에 씨를 직접 넣으면 일이 훨씬 수월하다. '그래? 날짐승이 먹으면 얼마나 먹겠나?' 나는 씨를 심기로 했다.

한참을 심고 있는데 뒷집 할아버지가 간섭을 하신다.

"몇 알씩 넣는 거야?"
"다섯 알이요."
"그렇게 많이? 세 알씩 넣어야지."
"날짐승들이 파먹어서요."
"하기야 날짐승이 오죽 극성을 부려야지!"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신다. 나중에 싹이 올라오면 두 개씩만 길러야 실하게 자란다며 알려주신다.

옛날 농민들은 콩을 심을 때 세 알씩 넣었다고 한다. 한 알은 날짐승 먹이로, 또 한 알은 땅 속의 버러지를 위해, 나머지 한 알은 사람을 위해 넣었다는 것이다. 새나 버러지도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지혜가 담겨 있다.

전깃줄에 앉은 비둘기. 이 녀석도 우리 콩밭을 헤쳐놓을까?
전깃줄에 앉은 비둘기. 이 녀석도 우리 콩밭을 헤쳐놓을까? ⓒ 전갑남
한 시간 남짓 일을 하여 씨를 다 넣었다. 흙 묻은 호미를 씻고 있는데, 비둘기 한 마리가 전깃줄에 앉았다.

"요 녀석, 한 군 데서 모두 파먹으면 안 되는 거 알지!"
#서리태#허수아비#농부#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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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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