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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과 통화를 했다. 이번 주 휴일에 내려와 앵두나무를 베라 하시는데, 처가와 인연을 맺은 이후 그리 흔치 않은 소모적 작업이다. 처가에서의 작업은 대부분 생산적이었다. 결혼한 직후에는 시간만 나면 처가로 달려가 일을 도와드렸다. 힘이 남아돌았던 시절인데다 서열도 가장 아래였기 때문에 주로 힘쓰는 일에 투입되었다.

특히 가을걷이 때는 단단히 한몫 거들었다. 콤바인으로 벤 벼를 거둬 단으로 묶어 나르는 것은 물론, 타작에도 앞장섰고 볏 가마를 나를 때도 힘든 줄 몰랐다. 그때 먹던 곁두리와 막걸리는 정말이지 이 세상의 음식 같지 않았다. 텃밭에서 따낸 배추와 상추에 알맞게 구워진 삼겹살을 놓고 시골 된장을 얹어 먹는 맛을 어디에 비기랴?

장모님과 처형들이 즉석에서 부쳐내는 부침개도 아주 그만이었다. 추수가 끝난 다음 봇도랑을 뒤져 끓여내는 추어탕은 그야말로 고향의 체액을 끓여 삼키는 것만 같았다.

장모님께서 텃밭에 심어 기른 부추를 비롯한 야채와 나물을 내는 것도 온전히 내 몫이었다. 처가가 서울에 인접한 경기도 양수리 부근이다 보니 경동시장에 내야 했는데, 그때마다 득달같이 달려갔다. 그리 크지 않은 차였지만 트렁크까지 꽉꽉 재워 실으면 적지 않은 양이었다.

장모님께서 고생스럽게 따낸 것들이 만 원짜리 지폐로 치환되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흐뭇하기만 하다. 다래 순과 취나물, 고사리, 돌미나리, 고추 잎, 비름나물, 돌나물, 들깨송이 같은 자연식을 실컷 얻어먹을 수 있던 것도 소중한 추억이다.

딸아이가 걷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노동이 놀이가 되었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딸아이가 나타나는 곳마다 웃음이 흐드러졌다. 아내가 잠시라도 눈을 돌리면 부추 싹을 뜯어와 꽃꽂이를 하거나 상추나 고추 모종을 짓이겨 소꿉놀이를 하기 일쑤였다. 딸아이가 정성껏 차린 진수성찬을 대접하려고 외할머니의 손을 이끌어 부를 때면 그저 웃음만 날 뿐이었다.

앵두나무
딸아이의 천국은 가을이었다. 처갓집 앞에는 제법 자란 밤나무가 있었는데, 언제부턴지 딸아이의 몫이 되었다. 아람이 벌어질 때가 되면 딸아이의 극성을 견디기 어려웠다. 외가에 가자마자 가장 먼저 밤송이를 바쳐야했다. 수확량이 미치지 못하면 아비를 앞세우고 온 동네 밤나무를 일일이 순찰하여 기어코 산타클로스 자루를 그득 채우곤 했다.

수확한 밤송이를 손수 까겠다고 난리를 치다가 가시에 찔려 악을 쓰고 울어대는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풋내가 풍기는 밤을 굽거나 삶아 먹는 맛도 아주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갓집에 관련하여 기억에 저장된 것 가운데 하나는 앵두나무다. 봄이 되어 야트막한 나무에 작고 하얀 꽃을 무더기로 피울 때는 주목받지 못한다. 그때는 다른 꽃도 많거니와 농번기에 접어들 무렵이라 주의를 끌기 어렵다.

그러다가 초여름에 접어들 무렵 빨간 진주알 같은 열매가 무더기로 달리면 잠시나마 사랑을 독차지하게 마련이다. 그 정도 크기와 색깔의 열매는 주목과 사철나무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반드시 먹는 용도를 따지기 이전에 단연코 앵두가 제일이다.

앵두는 입에 넣기 전부터 맛이 퍼진다. 특히 나무에 열린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사과를 작게 축소시킨 모양의 앵두는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하다. 잘 익은 것도 좋지만 약간 덜 익은 것의 맛은 형용하기 어렵다. 입에 넣은 다음 잠시 주저하다 슬쩍 씹을 때 새큼하고 싱그럽게 퍼지는 즙액의 느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것인가.

딸아기가 처음 앵두를 입에 넣고는 눈을 크게 뜨고 진저리를 치는 모습이 바로 어제 같기만 하다. 처갓집 옆에 자라는 스무 그루쯤 되는 앵두나무는 작은 보물이 산란되는 소중한 군락이었다.

그 앵두나무를 베러가야 한다. 지나던 사람들이 함부로 따는 바람에 밭둑이 허물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신 때문이다. 이제는 밭둑을 고치는 것도 힘에 부친 데다, 두 분 노인들만 사는 형편이라 두렵기도 하셨을 터이다. 아무튼 앵두나무 벨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처참하게 베어져야 하는 것인가? 측은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그것들이 사라지는 것은 또 하나의 기억이 단절되는 것을 의미한다. 처가부모님들이 계시지 않을 후일 - 그리 멀지 않았다 - 앵두는 기억을 리플레이 할 좋은 도구가 될 것인데, 그것마저 사라지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내 손으로 추억을 멸종시키고 싶지 않을 뿐이다.

#처갓집#앵두#추억#밤#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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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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